온다던 아줌마는 10시가 넘어도 오지 않았다.
전화를 넣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말았다
어물쩡하게 앉아서 부질없는 티비 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영 허하다
그냥 잠을 청하기에는 오늘 하루의 사건(?)들이 너무 혼란하다
담배 연기를 마음껏 마셔 본다. 담배 연기는 외로운 이의 위로가 된다더니
연기처럼 사라지는 시간과 인생이니 연기가 몸에 들어가면 안정으로 동화되는 것은 아닌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결국 그 여자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간다
약간의 인터발 뒤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네에^ 선생님, 눈이 오네요...”
“전화받을수 있어요?”
“네에....저야 좋죠...근데 눈오는거 보고 전화하시는거죠?”
“그래요, 눈오는거 보니까 생각나서요”
눈이 오는줄도 몰랐는데.....
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얀 거짓말이라든가....
“선생님, 어디세요?”
“네에...집에 왔어요...”
“저두 별장에서 나와서 집에 가는중이에요....”
그 여자의 집은 갑천변의 버드네 아파트라던데.....
“그냥 전화 한거예요....들어 가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 눈 오는데.....”
“........................”
“데이트 하실래요?”
데이트.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더구나 눈오는 날 하얀 눈을 맞으며 여자와 밤길을 걷는다는거 내 남은 팔자에 있으리라 상상해 본적이 별로 없는데.....
“제가 근처로 갈까요?”
적극적(?)으로 나오는 란같은 여자 고은아
싫지 않으면서도 선뜻 응답하지 않는 졸병같은 나의 습관
“아네요, 지금 어디신지 모르지만 제가 택시타고 갈께요....”
“그러실래요...든든히 입고 나오세요^^”
“알았습니다.....떨리네ㅎㅎ”
“네에? 호호호 저도 떨려요...얼릉 오세요...저 남선공원 앞에서 기다릴께요...거기 편의점 안에 들어가 있을께요....”
“알았어요 곧 갑니다~”
사람에게는 불이 있다.
뜨겁게 달구는 불이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그걸 혼이라고도 하고 정신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영이라고도 하고 열정이라고도 한다
내게 언제부터 불이 타오른걸까? 항상 타올랐지만 느끼지 못한거겠지. 여자를 향한 그리움이 없었던게 아니라 숨기고 억제하며 살았던 것뿐이리라
소녀를 쫒아 보낸 것은 아줌마의 화난 전화때문이었고 전화를 한 아줌마는 왜 오지 않는걸까? 참 희안한 밤의 시나리오다
잠이나 자면 될일인데 왜 부산을 떠는지 나도 종잡을 수 없는 내 마음이다.
요즘 내 생활이 그렇다
문희의 소개로 고은아를 만나고부터 변화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낀다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고 다시 문을 나선다.
도둑괭이같은 모습으로 눈이 오는 밤 속으로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기분....
<이제 손을 잡아 봐야지......얼마나 감격적일까.....>
그런 궁리를 하며 승강기 버튼을 누르는데.....나의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린다
<넌 총각이야....!!>
주위를 돌아 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누구?
혹시 돌아가신 어머니 혼이......
난 눈을 비벼 보았다. 그러자 또 들린다
<그 여자는 사별한 여자야....>
이게 어디서 일어나는 소리인가?
난 다시 주변을 돌아 보았으나 역시 아무도 없다
<내 가슴에서 벌써 갈등하고 있었구나....?>
그렇다고 내가 이 나이에 처녀 장가를 갈 수는 없잖아....
<왜 안돼?/ 안되죠.../왜 안돼?........./안됩니다. 전 처녀를 망칠 수는 없어요...절대, 그러고 누가 온대요/ 왜 안와 네가 맘만 먹어봐라 너만한 신랑감 어디있나...돈도 있고....>
하기야 난 결혼한 적은 없다. 총각이긴 하다. 그러나 총각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고 또한 그렇게 받아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란같은 여자. 누이 같이 나를 살펴주고 의지할 수 있는 여자가 좋다. 그렇다면 오늘 고은아를 만나는 것이야 말로 내 소망을 이룰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아파트 경비실을 지나 택시가 다니는 큰길로 나가는데 내 눈에 또하나의 심란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이 저건!!!!”
그 소녀다. 나와 몇시간을 보낸 그 꼬마 아가씨다.
누군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상대는 나이가 쉰은 된듯한 남자다,
“저런~~”
난 강도를 붙잡은 용감한 시민처럼 주먹에 힘을 주었다
“저게 정말.....”
나도 모르게 소녀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막 왔다갔다 하면서 인상을 썼다 소녀의 보호자나 되는것처럼......
그러나 상대방은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이다.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꼬맹이 아가씨는 거들떠 보지 않고 그 남자와 계속 무언가 지껄여 댄다
“아하!!!!”
난 큰 소리로 외쳤다 최소한 그 꼬맹이 아가씨가 들으라고 그랬으리라
남자가 나를 흘끔 쳐다본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얼굴인데......
누구지? 누굴까?
난 잠시 꽁무니를 빼고 뒤돌아서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려 머리를 가다듬어 본다
어디서.....?
한참후에야.........
“맞다 그러네....”
우리 아파트 옆에 침례교회가 하나 있는데 거기 목사님이라던 그분이잖아.....
“됐다.....가자......안심해도되겠구만.....”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를 잡았다. 아마도 오늘 밤은 그 목사님이 소녀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따뜻한 방에서 잠재워 주고 또 잘 타일러서 내일은 고향으로 가겠지.....잘 됐네....
기분 맞추느라 그런지 금새 택시가 내 앞에 와서 선다
“어서 오세요!! 어기로 모실까요?”
“남선공원요”
눈이 온다. 함박눈이 온다
대전에서는 첫눈인가 보다.
다른 지방에는 어제 눈이 많이 왔다던데 여기는 지금 첫눈이 내리는 것이다.
<오늘은 꼬옥 안아줄까?>
그러고 싶다. 이렇게 을씨년 스러운 바람에 실려 눈이 오는 날은 가슴이 따스한 여자를 포옹하면 더없이 좋겠지
그녀가 가만히 있으려나? 가만히 있고말고...나를 좋아 한댔잖아....
“눈이 멋지게 오네요 손님”
나이든 택시 기사가 나를 향해 말을 던진다
“그러네요.....기사님도 눈오면 좋죠?”
“좋긴요 미끄러워서 매상 못올려요 허허허”
“그래요...그래도 택시 타는 손님은 많을텐데...?”
“그렇지도 않아요...눈오고 푹하면 다들 걷는걸 좋아 하잖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걷는다는 것은 낭만이 아닌가
더구다나 연인과 함께 사랑의 불을 지피면서 걷는 밤깊은 눈길은 낭만의 극치이겠지
“다 왔습니다!”
남선 공원이 보인다. 공원에 보안등들이 눈을 맞고 서서 불빛을 낸다
밤의 불빛....밤이 외로운 나를 헤메게 한다. 거기에 나를 편하게 해주는 문희가 소개해 준 여자 고은아가 내가슴으로 불을 들고와 유혹(?) 하고 있다
나도 불이 되고 싶은가보다 뜨겁게 타올라 누군가를 태우고 싶은게 분명하다
괜히 초조하다.
눈이 거리를 하얗게 곧 덮겠지. 그리고 난 익숙하지 않은 여자와 저어기 갑천변의 한얀길을 손잡고 걷겠지. 그리고 손을 잡으면 내 가슴에 불이 일어나 그를 유혹하고 어쩌면 그녀와 난 사랑을 할지도 몰라.......
꿈에 부픈 내가 24시 편의점 문을 밀치고 막 들어서고 있었다.
손을 살짝 든 고은아가 미소를 지으며 머리에 맞은 눈을 털고 있는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이 오는 밤에 불의 용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