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공간은 본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약간 침침한 조명과 여기 저기 놓여 있는 이름도 알 수 없는 그림 도구들이 눈에 들어 왔다.
“제 화실이죠. 혼자만의 공간인데.....정말 오랜만에 손님이 오셨군요^^^”
내가 오랜만에 온 손님이 된셈이다.
“그림에는 백치라서.....그림뿐 아니죠 예술성이 제로라고 할까.....”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편하게 보고 느낀대로 생각하는게 가장 훌륭한 감상법일거예요. 억지로 감정을 꿰어 맞추어서 작품을 볼 수 있다면 프로가 아닐까요 ㅎㅎㅎ”
“저쪽에 저 그림.....”
“아....저거요. 놀라시겠지만.....”
그녀가 나를 올려다 본다. 눈동자가 아주 청아하다. 나도 시선을 맞추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기다렸다.
“저 그림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예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쑥스럽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내 곁에서 저만치 떨어져 간다.
당신이라....
그렇다면 저 그림.....
미완성으로 보이는 저 그림이 나......
“선생님, 너무 앞서 생각지는 마세요. 문희하고 선생님 처음 만나던날부터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그린거예요. 잘 완성하게 해 주세요^^”
“네에?”
“아아~ 선생님에 대한 제 감정이 변하지 않고 선생님이 제 자리에 있어 주셔야 전 그림을 그릴거예요. 아직 얼굴 윤곽외엔 그린게 없잖아요. 작품이 되려면 아직 ....
눈 코 그리고 입술....세미한 것들......선생님의 마음....”
당황스러웟다. 호감을 갖고 있구나하는 느낌은 받았지만.....
내 시선이 뜨거웠나보다. 그녀의 온몸이 내 눈으로 들어 온다
한번 안아주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할 용기는 아직 없다
“나가실래요...”
여자의 직감이겠지. 뜨거워질지 모르는 남자의 감정을 식히겠다는 그녀의 의도였으리라
그녀의 화실을 나오니 바람이 참으로 곱고 선하다.
“저 위까지 오솔길이 있거든요 한 30분 걸리는데.....”
“가볼까요....”
그녀가 앞서 걷는다 길 안내라도 하겠다는 듯.....
소나무와 참나무가 적당히 배치되어 있는 산내음이 몸을 상쾌하게 한다.
“좋은 공기를 마셔서 얼굴이 그렇게 고우신가봅니다”
“네, 제 얼굴이 고와보이세요^^?”
“그럼요....아주......”
“기분이 업 되네요^^ 하긴 남자분들 혼자사는 여자 보면 지나가는 말로 아님 괜스레 이쁘다 곱다 그러죠^^”
“아닙니다. 정말 곱습니다”
“짖궂은 분들은 섹시하다고 놀리고 그래요. 기분이 좋을때도 있고 나쁠때도 있어요”
“언제죠?”
그녀가 자그맣게 웃었다
“진심으로 이쁘게 봐 주시는분이 있는가하면 추근대는 분도 있잖아요 호호호”
“그렇다면 저는요?”
“선생님이 이쁘다고 하면 저야 설레죠 호호호”
“그래요....고맙네요. ”
진심이다. 진심으로 고맙다. 나를 인정해 주는 여자가 지금 있다는 것이 고맙다
“선생님, 궁금한게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선생님 사업장에 보니까 여자분 세분이 계시던데....”
“아아~ 네에 있어요”
“선생님하고 어떤...?”
어찌 알았을까 관심도 많으시지
내 가게에는 세명의 여자가 있다.
정미라고 노처녀다. 신앙이 돈독한 어찌보면 융통성 없는 처녀인데 무슨 뜻이 있었는지 3년전부터 내 밑에 와서 일을 배우겠다고 졸라서 얼마간의 일을 부려먹고 조금씩 가르치다가 지금은 꾀나 숙련된 기술자가 되어서 없어서는 안될만큼 된 아가씨다.
또 한 분은 나보다 서너살 더 많은 아줌마인데 한복 저고리만을 짓는 분이다. 꼼꼼하고 실수도 없고 작품성과 열정도 뛰어나서 한번 다녀간 고객들은 다시 찾아 오게하는 참 좋으신 분으로 내 뜻에 맞는다
언제부터인가 반찬이라든지 침구 빨래라든지 심지어 속옷을 제외한 옷들을 챙겨주고 있는 누님같은 분
또한 여자는 소위 치마전문 기술자인데 한마디로 열심히 사는 전형적 한국의 아낙네 상이라고 할까......
란같은 여자가 내 주변에 관심을 아주 많이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할까? 하기야....혼자사는 남자의 주변들이 궁금하겠지....
내 주변의 여자에 대해 난 대충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저도 가게 나가면 안돼요?”
“네에?”
“저도 선생님 밑에서 일 배우고 싶은데.....”
“그래요^^글쎄요.....지금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데 하하하”
“봉급은 안받아도 돼요. 무료 봉사 할께요. 심부름도 하고 무엇이든 다 할께요 호호호”
그녀의 말 속에 진심이 느껴진다.
난 교목 사이로 파랗게 보이는 하늘을 쳐다 보았다.
<이 여자가 정말 프로포즈를 하는것같다..>
그렇다. 요즈음은 여자가 적극적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억눌렸던 여심들이 시대가 허락한 해방구를 찾아 모든 면에서 여성의 비중이 남자를 압도하고 있지 않은가
각종 매체마다 행복한 여성에 대해 연구하여 발표하고 있다. 남자에게 달려 살던 시대에서 벗어나 정신적이나 육체적인 양면의 만족을 추구하는
남자는 좀더 힘들어진게 사실이다. 무능한 남자 고개 숙인 남자라는 타이틀 속에서 자칫하면 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지 않은가.
“선생님, 허락해 주세요....“
“아직요....우리 식구들하고 상의해 보구요. 저야 오시면 좋지만.....제 맘대로 하는 것은 좀 그러네요. 이해해 주시죠”
난처해하는 나를 보던 그녀의 표정에서 후회의 빛이 보였다
“생각해 볼께요. 맘 충분녀알아요. 너무 고맙고요.....”
“아네요 선생님, 제가 그만 너무 생각없이 군것같네요....죄송해요....없었던걸로 할께요.....”
“아닙니다.....상의해 보고 다시 말씀 드릴께요...”
“알겠어요....”
바람이 분다 차가운 바람이지만 단둘이 걷는 산길은 춥지 않다.
“선생님.....”
“왜요?”
“문희, 아직도 사랑하세요?”
갑자기 그녀가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걸까? 난 뭐라고 답해야 할까?
“문희가 그러는데 자기 때문에 선생님이 독신이 된것같아 미안하다던데....”
“허허허 그래요....그런말을 해요....허허허”
“...............”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짝을 못만난거죠. 제가 문희하고 솔직히 약혼을 했었습니까 살림을 살았습니까.....그건 아니고.....”
“아니고....?”
“팔자겠죠....”
그녀가 내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고 난 시선을 비켜 갈대들의 나부낌을 쳐다보고 있었다
포근한 갈대 숲........
사랑하는 여자를 포근하게 안아주고 싶다 저 갈대숲에 가리우고.....
“선생님, 이제 다 잊으세요”
“네?”
“그동안의 여자들 다 잊으시면 좋겠어요....저도”
난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녀도 나를 맞바라 본다, 무어라 말하고 액션을 취해야하나....서툰 나의 감정표현.....날마다 혼자만 살아온 탓에 혹시 내 가슴의 상처를 보자고 할까봐 두렵다. 나 혼자 딩굴며 지내온 과거들의 악습을 버리라 할까 두려워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아~ 오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손이라도 한번 잡아 주셔야죠....”
그녀가 손을 내 밀었다.
나도 손을 내 밀었다.
그리고 손을 잡았다. 조그만 손이 내 손안에 쏘옥 들어 온다
“고마워요 은아씨!”
“....................”
그녀의 손끝에서 따사로운 체온이 내게로 전해 온다
내 기운도 그녀에게로 가겠지
둔곡의 산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날리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노을이 숲에서 서서히 색을 칠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 인생이 변할 것 같은 직감이 내 가슴에서 또아리를 푼다.
사랑을 해.....여자하고 같이 살아........아이 낳을 수 있겠냐?
하하하하.....바람 참 조옷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