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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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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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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안그러니?


BY 라니 2011-11-23

 

00년 00월 0일

오랜만에 을하에게 전화를 했다가 마음만 상했다.

결혼 후 몇 번을 연락을 하고 만나자고 해 보지만 항상 돌아오는 것은 바쁘다는 말 뿐이다.

난 을하의 시댁이 어떠한지 신랑하고는 잘 지내는지 궁금하고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지 누구를 닮았는지 ,등등

이젠 둘 다 결혼한 유부녀로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 맘 편하게 수다를 떨고 싶은 것 뿐 인데 을하의 생각은 다른지 여전히 뭔가 가로막고 있는 것 같은  대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과 취업이라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가게 되었을 때도

내가 먼저 결혼을 하였을 때 도, 내가 결혼 후 여러 해 동안 아이가 안 생겨 고민할 때, 시댁 문제로 고민할 때, 친정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등 난 항상 을하에게 말하고 함께 고민을 나누고 위로를 받았다.

내가 처음 을하를 내 친구로 삼았을 때가 그립다.

내가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은 집에서의 탈출을 위해서였다. 

그리 큰 마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동네에서 제법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다른 시골 어른들에 비해 고등교육을 받으신 아버지의 활동 덕분에 나름 유지급 대접을 받는 집의 큰딸이라는 자리.

그럼에도 난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고 아버지가 사시는 큰집과 좀 거리가 있는 약간 외딴 곳에서 장애를 가진 어머니와 세 명의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한 번씩 큰 집에 할머니를 뵈러 갈라치면 항상 큰어머니의 히스테리틱한 고음의 잔소리를 먼저 들어야 했고, 어쩌다 할머니나 아버지께서 우리집에 다녀가시면 동네가 다 들썩일 정도로 격한 큰어머니의 반응에 동생들과 뒷산으로 피신을 가길 밥 먹듯이 하고 자란 곳.

어릴 때는 몰랐지만 점점 자라 생각이 생기면서 부터는 하루라도 편안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 큰어머니에게 네 살 어린 동생이 생기기전까지는 할머니뿐 아니라 큰어머니까지 아니  온 동네 어른들의 예쁨을 듬뿍 받고 자랐단다.

부잣집  외아들인 아버지께서 결혼 후 몇 년간 아이가 없자 할머니는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셔서 멀리 바닷가의 가난한 집에 약간의 장애가 있으신 어머니를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으로 들이셨다.

아니 그보다는 아들 하나만 낳아주면 친정식구 살 걱정없게 해주기로 약속을 하고 일종의 씨받이 형식으로 들이신거였다고 했다.

그러나 첫아이로 딸인 내가 태어났고 비록 장애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곱상한 외모에 똑 소리나는 살림솜씨와 음식솜씨에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아 조금 더 눌러 앉게 되었고 그 뒤 2년 만에 첫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줄줄이 연년생으로 두 명의 아들을 더 나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첩이 되어 본 부인과 한동네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참 세상일은 요지경이라고

여자의 질투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어서 우리 어머니가 두 번째 아들을 낳자마자 큰어머니가 임신을 하였고 큰어머니의 첫 딸 우리 아버지의 네 번째 자식 나의 세 번째 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하나 더 나으셨다.

그래서 살림을 내어 주셔서 엄마와 우리 4남매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큰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고, 늘 우리 편이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의 방문은 점점 줄어들었고 대신 큰어머니의 방문이 잦아  아이들 남겨놓고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며 매번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기 일쑤였다.

 어머니가 큰어머니에게 당하실 때 마다 동네 어른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하는 일이 신물이 날 즈음 어머니나 동생들이 안타까웠지만 도시로의 고교진학을 꿈꾸었고  돈이 많이 든다는 큰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난 아버지를 설득하여 도시로 나왔다.

 학교는 다르게 배정 되었지만 한동네 친구와 함께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게 되었다.

가족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늘 어머니나 동생들의 일상이 머리에 그려지며 도저히 학교생활에 집중 할 수가 없었다.

말할 필요가 없이 상황 상황때마다 위로가 되어 주던 동네 어른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 친구들이 한없이 보고 싶어졌다.

외로움이 어찌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차오를 즈음

도시에서 등교 첫날부터 눈에 들어오던 내 옆옆 자리의 아이(그 아이가 을하다)에게 쉬는 시간에 찾아가

“너도 시골에서 올라 온 것 같은데 나도 시골에서 왔는데 우리 친구 하지 않을 래?”라고 쓴 쪽지를 건넸다.

몇 일을 바라보아도 화장실 가는 것 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옆자리 친구와 말도 안 하고 분명히 저 아이도 나와 비슷한 처지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점심시간에 그 아이가 내 자리로 찾아와서 “넌 어디서 왔는데?” 라고 물으면서 우린 친구가 되었다.

 닮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항상 붙어 다녔다.

사실 내가 훨씬 더 예쁘게 생겼는데 친구들이 닮은 것 같다고 해서 보니 좀 그런 것 같기도 하였다.

도시로 나온 뒤 처음 우리 가정사를 그 친구에게 하였고 그 친구는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한 사람들이 참 많구나! ,○○이도 시골에서 왔는데 어려운 점이 있더라 신체적으로..... 난 내가 제일 힘들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너희들을 보며 그나마 내가 좀 났지 않나 마음을 잡고 살아가고 있어“라며  그 큰일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 주었다

참 고마웠다.

그 일을 다른 아이들에게 소문내지도 않고 침묵해 주고 더 이상 꼬치꼬치 물어 보지 않아서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어느 날 한 번은 일요일에 시골 우리 집에 데리고 갔었다.

시골에 갈 때마다 돈 타러 온다고 구박하는 큰 어머니를 피하고 싶었다.

친구를 데리고 가면 큰어머니가 그래도 도시에서 온 낯선 친구 앞에선 히스테리를 안 부릴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다음날 아침 산산이 무참하게 부서졌다.

새벽부터 올라와 괜한 된장 고추장을 트집 잡으며 한 바탕 소란을 피웠다.

그 내면엔 아버지께서 다녀가신 것을 포함 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아침밥도 먹는둥마는둥하고 어머니가 싸주시는 김치 보따리도 모른 체하고 집을 나왔는데 을하가 뒤에서 묵묵히 김치보따리 들고 아버지가 놓고 가신 돈 봉투를 어머니로부터 받아 들고 왔다.

그리고 도시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을하를 나의 영원한 친구로 정하였다.

가끔 직접적으로 을하에게  “넌 나의 영원한 친구라고” 말을 한 적도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 가끔 힘들다는 편지를 하긴 하였어도 항상 웃는 얼굴에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 하여주고, 내가 힘들어 할 때 ,조용히 어깨 내어주고, 내 부름에 항상 달려와 주던 을하였는데 요 근래 바쁘다고 일관하는 것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통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얼굴만 보아도 아니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 지는 듬직한 친구인데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간간이 “힘들다”정도로만 표현하는 친구인데 요즘 “바뻐”라는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이러다 영원한 내 친구를 잃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렇다고 어렵게 얻은 두 아이의 엄마로 한집안의 맏며느리로 한 남자의 아내로 살면서 많은 시간을 내어 그 친구를 찾아갈 엄두는 안나고 전화로라도 서로 안부를 전하고 시간되면 가끔 중간 지점에서 만나서 차나 한잔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을하에겐 여전히 잔잔하게 가라앉은 안개가 걷히지 않고 있다.

그 중심에 무슨 고통이 자리하고 있는지 한 번도 말하지 않아 오히려 서운 할 때도 있었는데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니 그 안개를 걷고 을하의 맑은 웃음 으로 내게 왔으면 좋겠다.

을 하 !

보고싶다.

넌 안그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