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나는 여자처럼 아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창밖으로 향하던 내 시선 속으로 유리창에 붙어있는 청개구리가
들어왔다. 처음엔 청개구린가 싶었다. 사각의 모서리에 물갈퀴를 가진 발이 전류가 흐르는
모양으로 밀착되어 있었다. 그 사각 안에서 복부쪽의 하얀 표피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청개구리였다.
개구리를 복부쪽에서 보는 것은 중학교 1학년 생물시간 이후 처음이었다.
아마도 4교시였을 텐데 그때 우리의 생물 수업은 개구리를 통한 양서류의 내부기관을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그날 생물 숙제는 조별로 개구리를 잡아오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잡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짝과 함께 봉지 하나를 들고 학교 앞 논에 가서 개구리를 잡았던 생각도
났다. 그날 조별로 잡아온 개구리를 확인한 선생님은 우리에게 해부를 위한 지시를
내렸었다. 먼저 곤충핀으로 개구리의 정수리를 찔러 마취를 시키게 했다. 그런 다음
개구리를 복부쪽이 위로 올라오도록 한 후 해부대 위에 고정시키게 했다. 그러고도 우리는
선생님의 설명을 한참 듣고 나서야 메스를 가지고 하얀 복부를 갈라 내장을 살폈던 것 같다.
그때 개구리를 해부하고 알게 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심방과
심실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과 해부를 했던 손에서 났던 비릿한 냄새 때문에 도시락을 먹지
못했었다는 것뿐이었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내 의식의 수면 위에 떠 있었고, 그래서 그
이후로 개구리가 무섭거나 징그럽지는 않았지만 만지는 것만은 꺼려왔었다.
청개구리를 유리를 사이에 두고 보니 그때 실험실의 해부대 위에 있었던 개구리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길은 한가했고, 쭉 뻗어 있었다. 차는 상당히 속력을 내고 있었다. 차가 속력을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은 바로 그 청개구리였다. 처음엔 단순하게 유리창에 붙어있나 보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얼마 지켜보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청개구리는 유리창에 몸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뛰어내리려는 자세도, 발을 옮기기
위한 여유로운 자세도 아니었다. 차가 달릴 때 이는 바람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지는 자세였다. 그리고 그것은 떨어질지도 모를 위험에서 살아나려는 노력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청개구리는 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조금씩 이동-
하고 있었다. 힘겨움이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처음엔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힘들지
않을 텐데 왜 저리 힘겹게 이동을 하고 있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살기 위한 또 다른
노력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간 것은 그 힘겨운 모습을 지켜본 얼마 후였다.
가슴이 아파왔다. 아이가 청개구리라는 말을 했을 때는 그저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한순간이나마 들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저려왔다. 아무도
청개구리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더욱 그랬다.
창문을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열 수 없는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떨어져 죽지 않기 위해서
밀착되어 있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구원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 셈이었다.
참 특별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생 처음 목격하는 장면이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물론 영화에서조차 본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인간 혹은 동물들이 사막이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혹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게 헤매던
것을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일 뿐이었다. 그래서 보는 순간은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시큰하게 나다가도 그 순간을 벗어나면 쉽게 허구의 세계로 돌려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을지라도 말이다. 헌데 그 허구의 세계로 돌려보낸
일들의 하나가 현실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