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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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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팬라이프


BY 조 양 희 2010-11-16

내나이 이제는 스물여섯.어엿한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그동안 알뜰살뜰 모아서 집도 전세로 옮기고 딸아이도 하나 더 낳고 열심히 살았다.

오빠의 일은 세월이 갈수록 신종 가라오케가 생기는 탓으로 일자리가 줄어들어 울산으로

경주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시피 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이제는 자리잡고 살려나 할때쯤 오빠는 나와 아이들만 남겨놓은채 좋은 아이템이 있어 친구랑

사업을 한다며 서울로 악기팔고.전세금빼고해서 금의환향하겠다며 가버렸다.

당장 생활비는 송금해주겠다며 보증금 100 에 월세 20만원을 주는 단칸방에 우리를 버려두고서..

처음엔 나도 오빠를 믿었다. 아니 상황 판단이 안되었다.

그렇게 오빠는 허리띠 졸라매며 열심히 모은돈 3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들고서 갔다.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고 석달이 되도록 오빠는 십원 한푼을 보내주지않았고.

오지도 않았다.가끔 전화가 올때면 아무걱정 말라며 일은 잘 되고 있다며 큰소리만쳤다.

근데도 그 말을 믿을수밖에는 없었다.

나이가 어린 탓이였을까? 나는 남편이 두려웠다.

싸움을 할때도 한번을 대들어보질 못했고 남편의 말을 거역하기란 상상도 못했다.

그러면서 우연한 기회에 담배를 배우게됐다.

가끔 담배를 피우다가 남편에게 정말 개 맞듯이 맞기도 여러번...

그렇게 온몸에 피멍이 들고 유리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그 파편이 튀어 밟혀

발바닥이 찢어지고 몽둥이로 맞아 머리가 깨진적이 있어도 

나는 단한번을 맞서질 못했다.

그리고 우는 소리도 크게 한번 내보지 못했었고 누구에게도 말해본적도 없었다.

피멍이 다 가실때까지 아이들과 방안에서만 생활했고 일체 외부출입을 않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남들이 알면 창피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도 나는 끊지 않았다.그냥 반항이라고 할까?

유일하게 남편말을 거역하는...

방세를 제때에 못내어 주인아주머니의 차가운 눈총때문에 아이들은 밖에 나가 놀지도 못했다.

쌀은 바닥난지 오래였다. 라면으로 아이들과 끼니를 떼우고 있을즈음.

시어머니가 하루는 오시더니 사는 꼴을 보며 한숨을 쉬시더니 쌀과 생활비를 5만원 주고 가셨다.

미련했을까? 나는 내 사정을 아무에게 말하지 않았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었다.돈을 번다는 생각은 아예 생각조차도 나지 않았다.

어느날 남편은 양복을 쫘악 빼입고서 나타났다.

밀린 집세를 해결해주고 생활비라며 3백만원을 내놓았다.

나는 금방 부자가 될거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온식구들을 모아놓고 신이나서 열심히 강연(?)을 했다.

재팬라이프라는 자석요 판매회사라며 소개한 친구를 평생의 은인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며칠동안 식구들을 설득하더니 시누이신랑이랑 큰시동생까지 데리고 다시 올라갔다.

어느날 시장을 다녀오다 길가에 붙여진 점포세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오며가며 남편 속옷이랑 내속옷이랑 아이들 양말등을 사러 들리던 가게였다.

그냥 물어보았다.

"가게 이제 안하세요? "

"응 애기엄마 !나 더 큰데로 옮겨..왜? 장사함 해볼래?"

"아이구 내가 무슨 장사는..비쌀텐데..."

"이까짓게 뭐 비싸! 그라고 새댁이 한다카믄 내가 주인한테 잘말해줄께 집세 올리지말라꼬.."

"얼만데요? 이장사해볼라카믄 얼마나 있어야되요?"

정말로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가건물이라 보증금은 10만원이고 집세는 6만원 수도가 없기에

수도세는 없고 전기세는 월 2만원.화장실을 공동으로 쓰니까 정화조만 한달 5천원.

물건값포함 권리금 50만원...가게는 볼품없다.문도없고..한평남짓...

집에 와서는 내내 구미가 당겼고 생각에 사로잡혀 일이 손에 들어오지않았다.

남편이 주고 간돈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나는 결정을 해버렸고 덜렁 혼자서 인수를 해버렸다.

가끔 하는 전화로는 부장이 되었고 곧 이사가 될거라며 차는 다이너스가 좋으냐 체어맨이 좋을지

생각해 놓으라며 말하는 잘난(?) 남편이 있었는데도...

그래도 가게라고 문을 열어놓을래니 아이들이 문제였다.큰아이는 여덟살.

작은애는 이제 겨우 네살이다.

아이들 둘만 집에 남겨두고 가게로 나왔더니 하루는 큰아이가 라면을 끓여 먹을려다 냄비를

작은 아이 발등에 쏟아 아이가 화상을 입기도 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않아 큰 문제가 될거란 생각을 못했는데 가게가 도로가 인접이라 위험하고

문도 없는 난전인 셈이라 아이들과 함께할수는 없었다.

또 아이들을 둘만 집에 두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는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하루는 큰아이가 나를 도와줄 마음으로 연탄불을 갈려다 연탄을 다 부셔놓기도 했다.

의논끝에 아이들을 둘째고모네가 사상에 살고 있는데 그 고모집에 아이들을 몇달간만 보내기로했다.

내년이면 큰아이도 학교에 보내고 작은 아이도 애봐주는 집에 보낼거라 생각하면서..

아침 8시면 가게로 내려와 문을 열고 저녁에 밤 10시까지 장사를 했다.

점심은 옆가게 언니에게 부탁을 하고선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저녁은 마치고 씻고먹든가 아니면

그냥 잠들었다. 이틀에 한번은 아이들을 보러 사상엘가곤 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고 또 보고 돌아서서 오는 내내는 차안에서 울기만 했다.

아이들도 나도...따라나서겠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떼놓고 와야만 하는 에미심정은...

그러면서 나는 내 엄마를 더욱더 용서할수 없었다. 오히려 저주했다.

그렇다고 생활비 한푼을 주지않는 남편만을 믿고 무작정 아이들과 굶고 기다릴수도 없었다.

말그대로 잡화점이라 여러가지 물건들을 취급을 하다보니 장사는 잘 되었다.

한벌짜리 아줌마들의 평상복.넥타이.런닝 속옷들.와이셔츠 양말등등..

그 좁은 가게에서 하루에 십만원 이상은 매상이 올랐다.

일이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장사가 잘 되었기에 나는 깡으로 버텼다.

몇달간만 보내놓으려던 계획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고모에게도 아이들 양육비라기 보다는 간식값으로 30만원씩 보내었다.

그렇게 나는 집안에 가장이 되었다. 남편은 감감무소식이다.

시동생은 서울에 가자말자 이건 아닌것 같다며 내려와서 본업에 충실하고 있는데...

시누이 남편도 진시장에 그 좋은 가게를 처분하고 시누이와 아이들만 남겨놓고 서울로 갔다.

처지가 같아서 일까? 시누이는 나를 찾아오는 횟수가 늘었다.

아이들도 또래라서 서로가 너무나 잘 어울려 놀았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나 한것처럼

큰아이는 꼭 일주일 차이.둘째아이들은 한달 차이였다.둘다 딸만 낳았다.

그렇게 남들에게는 못하는 얘기들을 시누이하고는 털어놓고 얘기할수 있었고.서로 위로도 받으면서

가끔은 마치고 소주도 한잔씩 하는 친구같은 사이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담배도 서로 같이 피웠고..시누이도 담배를 피웠었단다.

그러다가 시누이는 전세방을 우리동네에 얻었고 아이들도 데려오고해서 서로 합쳐서

한집에 같이 살게 까지 되었다.

고모에게 주던 양육비. 또 집세. 이래저래 시누이에게 백만원을 주기로 하고선...

다른것은 따지지않았다.아이들을 걱정없이 맡겨놓을 수있었고 같이 살수 있었기에..

남편들 시중들지 않아 좋았고.자유로와 좋았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행복해하기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이렇게 애들 고생시키지 않고 옆에서 늘 함께할수만 있다면...

본의아니게 이제는 시누이와 그 애들까지 책임지는 가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