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세상에 뭐 저런 나쁜 년이 다 있어...저런저런..저런 것들은 다 없어져야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엄마의 흥분한 음성이 들려온다.
"엄만 딸이 들어오는데 내다 보지도 않고 뭘 그리 욕해가며 열심히 보는 거야?"
평소의 교양있는 엄마답지 않게 "년"자 소리까지 섞어가며 드라마에 열중해 있는 엄마 옆에 앉으며
뭔가싶어 화면을 바라보니,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중년의 여자는 눈물을 떨구고 있는데 그녀 앞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는 도도하게 일어서서 나가고 있었다.
"뭐야? 끝난거야?"
"아니 세상에 저 젊은 것이 뭐가 아쉬워서 가정 있는 남자를 뺏을려고 저런다니.
저것 좀 봐...예전같으면 본처가 쫒아가서 저런 년들 머리채를 휘어잡고 한바탕하고 그러더만
요즘은 어찌된게 바람핀 것들이 더 큰소리라니까."
아.....묻지 말껄.....
공연히 내 볼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어 엄마 옆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엄만...암만 그래도 그렇지 안쓰던 "년"자 소리까지 하고 그래? 듣기 거북하게...그러지마."
"어머, 얘가...그 정도 소리도 못하니? 하여튼 남의 가정 깨는 것들은 가만히 두면 안돼."
슬며시 일어나 방으로 들어서자 고요한 적막이 감싼다.
잠시 불도 켜지 않은 채 눈을 감고 그를 떠올려 본다.
그가....조금은 피곤한 모습으로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봐야겠다고 그랬다.
그의 부인이....아무래도 뭔가 눈치를 챈거같다고...
그동안 아이들한테만 신경쓰느라 그에겐 도통 관심조차 없는 것 같던 그의 부인이었지만
솔직히 지난 2년동안 불평 한마디 없이 오히려 자청해서 매일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이제서야
수상하다고 생각한 게 이상할 정도이긴하다.
그만큼 남편을 믿었기 때문일까....?
그는 가정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의 나이 아홉살이던 해, 그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간 후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 태어난 여동생은 새어머니를 친어머니로 알고 컸지만 그는 그렇지가 못했다.
새어머니는 동화책 속에 나오는 계모처럼 그를 학대하거나 못살게 굴지는 않았지만
결코 그를 따뜻하게 보듬어주지도 않았다.
그가 외출이라도 했다가 집에 들어서면 새어머니와 그의 여동생, 그리고 새어머니가 낳은 두 동생은
무언가 재밌는 얘기를 하고 있다가도 뚝 멈춰버리곤 했다.
물과 기름처럼 그는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항상 이방인처럼 겉돌기만 한 그 시절...
그의 꿈은 따뜻한 가정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있고,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따뜻한 가정.
차가운 이 가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따뜻한 가정을 갖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