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베이지에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과 재즈풍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미리 예약해둔 룸에는 벌써 친구들이 파트너와 함께 즐거운 수다중이다.
“미안, 좀 늦었지.”
승현과 함께 들어서자 모두의 관심은 내 파트너에게 쏟아졌다.
그동안 친구들에게 선 본 것조차 이야기 하지 않았으니 궁금한 것이 많기도 하리라.
“지영이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다니 오늘 역사적인 날인데?”
“두 사람 어떻게 만난 건지 풀스토리 한번 풀어놔 보시지~”
승현에 대한 환영인사와 축하잔이 오가고 모두들 즐겁게 웃고 떠드는 걸 보며 오늘 파트너를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그동안 즐거워야할 크리스마스 파티가 조금 불편하기도 했었다.
아무래도 혼자만 파트너가 없다보니 눈치 보이는 부분도 있었고 지나치게 친구들이 나를 챙기는 것도
부담스러웠었다.
모두들 기대에 찬 눈으로 우리의 러브스토리를 궁금해 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우리 몇 달 전에 선 본 사이이고 이제 겨우 다섯 번 만났다라고 말하기는 싱거웠다.
승현이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급조된 러브스토리를 풀어놓는다.
“아주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죠...버스에서 청초한 지영씨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해서
일부러 우산을 놓아두고 따라 내렸어요...우산 좀 씌워달라고 했죠....
뭐...그렇게 만나서 오늘이 딱 100일째 되는 날이네요.”
“어머머...진짜?”
“어째, 조작의 냄새가 나는데?”
“그러게...지영이가 우산 씌워달랜다고 처음 보는 남자랑 우산 같이 쓰고 다닐 애가 아닌데?”
모두들 시끌시끌 진위여부를 따지느라 난리들이다.
“ㅎㅎㅎ 운명적인 만남이란 뭐...그런 거 아니겠니? 호호호”
“어머, 쟤 뭐래는 거야? 운명? 그럼 진짜란 말야?”
항상 꿈꾸던 운명적인 만남....갑작이 엉뚱한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지만 유쾌했다.
모처럼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동안 어색하기만 하던 승현과도 한 발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준희의 파트너는 2년째 기영씨다.
매년 파트너를 바꾸던 준희가 작년 처음으로 우리 모임에 기영씨를 데리고 왔을 때,
솔직히 얼마 못갈 줄 알았다.
그렇게 조건 따지던 준희의 기준으로 볼 때 결코 오래 갈 사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대같이 큰 키에 다소 어리숙하게까지 보이는 그는 사람 좋아보이기는 하지만 특별한 매력이
있어보이진 않았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준희는 지난 2년간 간간히 그를 우리 모임에 데리고 왔고
더 이상 다른 남자를 만나지도 않았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하다는 걸 준희를 보며 느꼈다.
저마다의 인연은 다 따로 있는 법이라고.
“오늘 지영씨 참 멋진걸...스카프가 참 잘 어울려.
우리 승미도 그런 거 하나 사줘야겠다.”
준수가 잔을 들어보이며 눈을 찡긋한다.
벌써 7년간이나 봐왔으니 때론 편한 친구같이 느껴질 때도 있는 준수다.
“아...고마워. 내가 좀 멋지긴 하지?ㅎㅎㅎ”
내가 농담하는 게 의외라는 듯 승현이 웃어보인다.
“너, 나중에 다 이실직고해.
이렇게 깜쪽같이 우릴 속이고 있었다니...”
어느새 자리를 바꿔 옆에 앉은 승미가 귀에 속삭이며 승현에 대한 궁금증을 나타낸다.
아마 오늘 밤이 지나면 친구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정말 운명의 만남인 것처럼 친구들에게 환상을 심어줄까....
아니면 솔직히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관심 끄라고 말해줄까....
정작 내 마음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불씨가 자라고 있는데 결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서글프다.
이렇게 친한 친구들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속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불현듯 그가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