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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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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저편


BY 유빈 2010-08-11

어느새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다.

이상기온이라나 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날씨에 눈 대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지만

그래도 12월의 거리는 온통 빨간색이다.

“어디 들어가서 따뜻한 차라도 마실래요?”

지난 맞선이후 세 번째 만남이다.

조심스럽게 받쳐주던 우산을 접자 그의 한쪽 어깨가 비에 젖어있다.

엄마 성화에 못이겨 몇 번 다시 만나기는 했지만 만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오늘처럼 내가 젖지 않게 우산을 기울이느라 정작 자신의 어깨는 온통 젖어있는 걸 볼 때

내가 이 사람을 계속 만나도 되는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낮시간인데도 까페 안에는 작은 반짝이 등이 불을 깜박이고 있고 장식 벽난로 안에서

모형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오랜만이죠? 그동안 많이 바빴나봐요?”

“아...네...좀...”

주문한 커피가 나올 동안 말 수 적은 그와 숫기 없는 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 흐른다.

“저기....제가 듣기론 승현씨 집에서 결혼소식 기다린다고 그러시던데....”

그도 나처럼 집안 어른 성화에 등떠밀려 나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집에서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해 할 것은 당연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별 말씀 없으시더니 올 핸 부쩍 결혼 얘기를 많이 하시네요.

저도 이제 서른이 된다싶으니 사람 만나는 것도 신중해지는 것 같구요.“

“저번에도 말씀 드렸지만.....전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요.

맞선이라는 게 그냥 소개팅이나 미팅하고는 달라서 결혼할 마음도 없이 계속 만난다는 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그가 당황스러운 듯 물 잔을 들던 손을 내려놓았다.

“승현씨, 참 좋은 사람 같아서 만나는 동안 저도 편하고 즐거웠어요. 하지만...”

“잠깐만요. 지영씨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는데 제 말 먼저 들어줄래요?”

정말 힘든 순간이다.

누구에게 부탁하는 만큼이나 누구를 거절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더더욱 나에겐 이런 일들이 정말 피하고 싶은 일들 중 하나이다.

“솔직히 집에서 지영씨 만나는 거 알고 결혼얘기 꺼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 역시 연애기간 없이 결혼을 서두르고 싶지도 않거니와 그런 일로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아요.

지영씨가 결혼얘기 때문에 부담이 돼서 절 만나는 게 꺼려진다면 그냥 편하게 생각해주면 안될까요?

부담 없이 가끔 만나서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그런 이성친구 한 명쯤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지영씨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 결혼얘기는 꺼내지 않을께요.”

“그래도.......”

“걱정말아요. 그냥 편한 친구로 생각해줘요. 힘든 일 있을 때 의지가 될 수 있는 그런 친구로

옆에 있을께요.”

그의 간절한 눈빛에 더 이상 무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결혼을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을 하자고 서두르지만 않는다면 굳이 그를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당장 이번 크리스마스 친구모임에 데려갈 파트너가 없어서 혼자 가야하나 고민이었으니까.

매년 크리스마스이브마다 파트너 없이 나간 사람은 나뿐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 모임인데 유독 크리스마스이브만 되면

남자친구와 함께 오려는 통에 어느 순간부터 쌍쌍파티가 돼버렸다.

일찌감치 짝지가 있는 승미는 항상 준수를 데리고 왔고 준희는 항상 파트너가 바뀌었으며

영주나 미란이는 데리고 올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지만 한 번도 데리고 간 적이 없는 사람은

나뿐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나도 파트너를 데리고 간다면 친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