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장소는 회사 근처의 깔끔한 일식집이었다.
미리 예약된 룸으로 들어가자 간단하게 세팅되어진 상차림이 정갈하다.
기모노차림의 여주인이 직접 들어와 우리를 맞아준다.
“다 오셨어요? 그럼, 음식을 내올까요?”
“아니, 한 사람 더 올꺼니까 음료만 먼저 좀 주고 음식은 천천히 들여와요.”
누가 또 온다고....?
미처 궁금할 사이도 없이 미자가 손까지 번쩍 들며 묻는다.
“팀장님, 누가 또 와요? 우리 팀 다 왔는데요?”
“개발팀 박대리가 오늘 회식자리에 참석하겠다고 신신당부해서 말이지.”
박대리는 우리 팀 정대리와 입사동기로 같은 학교 출신의 친한 친구사이였다.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우리 사무실에 죽치고 있으면서 시간을 보내다 갔기에 우리 팀 사람들과는
두루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팀 회식까지 따라오다니 대단한 넉살이다 싶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박대리가 들어왔다.
“이거, 죄송합니다. 불청객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모두들 의아해하는 가운데 내 옆에 앉아 있던 정대리가 일어서더니 자리를 비켜준다.
“아, 이 친구가 오늘 누구한테 사랑고백을 하고 싶어 하길래 제가 팀장님께 부탁 좀 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함성소리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박대리는 평소의 활달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무척 쑥스러운듯 연신 머리를 긁적이며 내 옆에 앉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
팀장님을 바라다보니 모른 척 벌써부터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순간 아침마다 놓여있던 선물 상자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의 마니또는 박대리였단 말인가.....?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그저 멍할 뿐이었다.
박대리는 다른 직원들이 벌주라고 한 잔씩, 격려주라고 한잔씩 따라주는 술을 다 받아마시고 있었다.
나는 잠깐 화장실을 가는 척 나가면서 정대리를 불렀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정대리님, 미리 저한테 말씀이라도 해주시지...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곤란하게 하세요.”
정대리는 잠시 상황판단을 하려는 듯 나를 건너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지영씨한테는 정말 미안한데...태훈이 그 녀석이 어찌나 속앓이를 하는지 말이야.
실은 나도 처음에 지영씨 좋아했거든...아..뭐...좋아했다기보다는 호감이 갔었지.
근데 태훈이가 하도 지영씨 좋다고 해서 내가 밀어주기로 하고 일찌감치 마음 접은 거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린지...정대리는 이미 많이 취했는지 평소같으면 하지 않을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그 녀석 보기보다 숫기가 없어서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지영씨한테 말한마디 못붙이고 그러는게 안타까워서 그냥 확 고백이라도 해보라고 내가 자리 마련한거야.”
“그래도 이건 아니죠, 차라리 저랑 둘이 만나게 해주셨으면 좋았을껄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모두들 다 있는데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는거예요.”
“그래도 한번 만나봐, 괜찮은 녀석이라니까.....”
어이가 없었다. 정대리도 박대리도...
남자의 우정은 남녀의 애정까지도 관리를 해주는 사이였단 말인가.
“아무튼 전 이 자리가 너무 불편하고 싫으니까 그냥 조용히 박대리님 데리고 나가주세요. 아니면 제가 갈테니까요.”
화장실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룸으로 들어가보니 정대리와 박대리는 자리에 없었다.
모두들 술이 꽤나 됐는지 두 사람이 없어진 것도 모르고 각자 술마시기에 여념이 없었다.
“언니, 괜찮아...? 우와~정말 쇼킹이다 그치?”
속상한 마음에 나 역시 내 주량을 넘어서고 말았다.
“오늘은 여기까지하고 그만 가는 게 좋겠군”
남자직원들이 2차 가야한다고 고고를 외쳐댔지만 팀장님은 그들을 택시 태워 보내버렸다.
모두 일일이 차를 태워 보내고 나자 팀장님과 나, 둘만 남았다.
“지영씨는 내 차 타고 가지...가는 방향이니까...”
대리기사가 오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자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구슬퍼서 눈물이 날 것 같던 그 음악.....
“이 노래 제목이 뭐예요? 귀에 익은 음악인데......”
“도니제티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
“아....맞다.....근데 이 노래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 저번에도 이 곡만 듣고 계시더니...
항상 차에서 들으시나 봐요?”
“그냥.....내 마음같아서.....”
“.......네?”
팀장님은 더 이상 말이 없다.
잠이 든 건지 두 눈만 감고 있을뿐.
집에 가는 동안 차 안에서는 애절한 노랫소리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