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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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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BY 유빈 2010-06-25

"...아이는?"

지난 10년간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 제일 먼저 물었던 건 내 아이의 존재여부였다.

결혼 생활 7년이면 아이가 있을 법한데, 내 아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가 된다는 건 너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겐 아이가 없었다.

친척들에게 둘러싸여 이틀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그동안 차마 묻지못했던 질문을 남편에게 했다.

"왜 우리는 아이가 없어요?"

남편은 내 두 손을 마주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곧 생길꺼야....아직 아이가 생기기에 시간은 충분하니까...."

그게 무슨 의미일까....7년동안 아이가 안생겼다면 우리는 불임부부인가...그렇다면 그동안 아이를 갖기위해 무수한 노력을 했던 것일까....숱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힐 때였다.

"지영아..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너는 아이를 그다지 원하지 않았어"

이게 무슨 말인가..나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다.

지나가는 아이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고 꼭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야했으며 갓난 아기를 보면 눈을 떼지 못했는데..

아이들도 나를 잘따라서 사람들은 내게 유치원 선생님을 하면 좋았을거라고 그랬다.

그런 내가 아이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니...내 아이를...

안동 시댁에서 규태를 품에 안던 순간 찌르르 가슴이 저림을 느꼈다.

그 달콤한 살냄새, 부드러운 감촉, 말랑한 느낌에 눈물이 핑돌았다.

내가 이 아이조차도 기억 못하는구나....내 기억없음이 다시 한번 가슴을 후려쳤었다.

"말이 좋아 연애 3년이지 한 2년 반은 내가 너 쫒아다니기만 했다...나 혼자 짝사랑한 셈이지.

나는 그 날 선보러 나온 너를 보고 첫 눈에 반했어..그래서 밥도 같이 먹지 않고 널 데려다줬지..

밥을 같이 먹으면 이루어지지않는다는 속설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사소한 거라도 피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그 이후로 너는 날 만나주지 않더라.

그래도 계속 전화를 하고 소개해준 숙모님 친구분한테 부탁해서 다시 말도 넣어보고 애를 썼지.

마지못한듯 너는 나를 몇 번 만나줬어.

그리고는 당분간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그랬지.

나는 괜찮다고 했어...결혼이 전제되는 만남이 불편하다면 그냥 편한 친구처럼 지내도 좋다고.

그렇게 우리는 한달에 한두번쯤 만났지.

만나면 밥먹고 차마시고...더 이상의 곁을 주진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네 곁에 있고 싶었다."

남편은 무슨 고백이라도 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품에 안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쩌다 네가 너무 보고싶어 밤중에 너네 집 앞으로 달려가도 너는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았지.

주말을 함께 보내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너는 친구들과 함께이거나 가족들과 함께였어. 

내가 한 발 다가가면 너는 두 발 뒤로 물러섰기에 나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기다릴 수 밖에 없었지.

그러다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프로포즈를 했어...네가 영영 나를 만나주지않을까봐 불안해하면서..

그런데.....그런데말이다...정말 뜻밖에도 네가 승락을 하더구나....

결혼하고 5년동안은 아이를 가지지않는다고 약속하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지...니가 그렇게 쉽게 내 청혼을 받아들일거라 생각지 못했거든..

5년동안 아이쯤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결혼한 거야...우리...

막상 결혼하면 마음이 바뀌려니했는데 넌 완강했어..

그래도 나는 좋았다..네가 내 곁에 있어 행복했고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지.

넌 참 좋은 아내였고 며느리였어.

난 지금도 네가 너무 사랑스럽고 고맙다."

남편의 긴 독백같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그에게 너무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짜자고 나는 이 사람에게 그토록 모질었을까.

이렇게 착하고 좋은 사람을...

도저히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지금은? 5년이 지났잖아요?"

남편은 슬며시 웃으며 내 코를 살짝 잡았다놓았다.

"왜? 나한테 미안한가보지? 그러게 속 좀 작작 썩이지..

괜찮아, 당신 결혼하고 나서 나한테 너무 잘했으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피임만 안하면 바로 임신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병원에 갔더니 피임을 오래하면 몸이 거기에 적응이 돼서 잘 안되는 수가 있대.

하지만 걱정할 건 없어. 너랑 나랑 모두 건강하니까 좀 시간이 걸릴뿐이지 아무 문제없다고 그러더라구."

나때문이구나....

나는 나의 알 수 없는 행태에 화가 났다.

남편이 이야기 해준 나는 내가 아닌 듯 했다.

그날 밤, 나는 나에게 보여준 남편의 한결같은 사랑에 고마워하며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