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이미 복도로 흘러나온 맛있는 음식냄새와 문너머 왁자한 소음이 내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만든다.
1104.....
단정하게 현관문 앞에 붙어있는 숫자들을 외우기라도 할 듯 곱씹고 있는 나의 손을 남편이 다시 한번 힘주어 잡아준다.
그가 벨을 누르자 문너머의 소란이 잠시 멎는가 싶더니 현관문이 활짝 열리며 그의 어머니가 신발을 미처 다 신지도 못하고 달려나와 나를 맞아주신다.
"어서와..오는 데 길은 안막혔고?...몸은 어떠니?"
반가움과 다소 걱정어린 눈빛으로 나의 등을 두드리며 연신 질문을 해대시는 시어머니에게 겨우 고개 숙여 인사하고 들어선 거실엔 낯모르는 얼굴들이 가득이다.
시어머니와 누나 가족이 다일거라 생각했는데 스무명 가까이되는 친인척들이 모여있다...나를 보러...
당황해서 어디다 시선을 두어야할지 모르는 내 옆에 남편이 얼른 다가와 어깨를 감싼다.
"천천히 얼굴 보자니까 뭐하러 이렇게 다 모였어요..오늘이 무슨 잔칫날인줄 아시나...하여튼 말을 안들어요"
내 긴장을 풀어주려는듯 남편은 너스레를 떨며 친척들을 소개시켜준다.
두 분의 숙부와 숙모, 고모와 고모부, 외삼촌과 외숙모,이모 세 분...그리고 사촌들과 조카들...
시가와 외가쪽 친척들이 다 모였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같은 고향으로 어릴 때 앞뒷집에 살며 오누이처럼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친가와 외가 친척들은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며 수시로 같이 모여 어울렸다는데 남편은 그런 이야기까지 미처 내게 해주지 않았었다.
무어라도 거들어야할 것 같아 주방으로 들어서려는 나를 한사코 어머니는 나가있으라신다.
그렇다고 거실에서 낯모르는 친척들과 앉아있기도 부담스러워 슬며시 방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본다.
벽 한쪽이 책으로 가득하다.
한자로 된 고서가 많았고 문집이 여러 권 눈에 띈다.
이리저리 책을 뽑아 훑어보고 있을 때 방문이 슬며시 열리며 꼬마 하나가 들어온다.
"외숙모, 나 기억 못해요? 나 외숙모 많이 좋아했는데...나 정말 몰라요?"
누나가 서른넷에 낳았다는 여섯살 꼬맹이 규태는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그 아이의 간절함에 어쩐지 미안해져서 살며시 손을 잡고 눈을 맞춰준다.
"미안...하지만 곧 기억날꺼야...그래도 외숙모가 규태 사진보고 이렇게 만나니까 한번에 알아보겠는 걸..외숙모도 규태 많이 좋아했을꺼야..그치?"
규태는 다행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품에 안겨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