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겠어?"
남편이 걱정스러운듯 돌아보며 재차 묻는다.
시댁이 있는 안동으로 가는 길이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에 돌아온 그 날, 나는 하루종일 앨범을 꺼내봤었다.
내 기억 속엔 없지만 사진 속에서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지나간 세월을 머릿속에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일일이 사진을 찍었던 장소와 상황을 빠짐없이 옆에서 설명을 해줬고, 기억 속에 없는 사람들의 신상명세를 낱낱이 일러주었다.
그리고....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아니 기억하지 못할뿐인 시집식구들의 얼굴을 낯설어하며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동그란 얼굴에 친절한 눈웃음을 가진 누나와 3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시아버지, 한복이 잘어울리는 아담한 체구의 시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하나뿐인 며느리를 유난히 예뻐하셨다는 시아버지는 남편보다도 나를 더 찾았다고 하신다.
내 사고 소식에 시어머님이 놀라 달려오셨지만 내가 깨어나는 걸 보지 못하고 안동으로 내려가셨다가 내가 집으로 돌아 온 후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만큼 고부간의 사이는 좋았던 듯하다.
시어머니 말씀에의하면 이틀에 한번은 반드시 내가 안부 전화를 드렸기에 어쩌다 사흘째 연락이 없으면 혹시나 무슨 일이 있나 염려가 되어 안절부절하셨다한다.
그동안 전화로만 통화하던 시어머니와 시누 만나기를 더 이상 미룰수 없어 연휴가 끼인 주말을 이용해 가는 중이다.
운전을 하고가는 그의 셔츠 입은 뒷모습이 믿음직하다.
그는 조수석에 앉으려는 나를 굳이 뒷좌석에 앉게했다.
그러고보니 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갈때도 그는 나를 뒷좌석에 앉혔다.
"왜요? 왜 나를 옆에 못앉게해요? 옆자리는 애인자리인가?"
내가 입을 비죽내밀고 묻자 그는 어이없다는듯 허허웃더니 지나가는 말처럼 그랬다.
"만약 사고가 나면 조수석이 제일 위험하거든....."
그는 항상 나를 뒤에 앉혔단다. 가끔 아주 가까운 거리를 이동할때는 제외하고...
남편은 말수가 적었지만 자상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처음 병원에서 그를 보고 내 남편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더군다나 퇴원하고 친정집이 아닌 모르는 남자와 낯선 집에 가야된다는 사실에 참으로 당황스럽고 난처했었다.
한 번밖에 본 적없는 남자와의 동거라니...
3년의 연애 끝에 7년을 함께 살았다고는 하지만 내 기억 속의 그는 낯선 남자였다.
처음 몇 일동안 남편의 자상한 배려와 친절에도 불구하고 어색함에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며 그가 그랬다.
다시 연애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고...
"당신 나한테 말높이는 거 몇 년만인지...부부는 동격이라고 꼬박꼬박 맞먹더니말이야..하하"
처음엔 내 기억없음을 걱정스러워 하던 남편이 기억은 차차 돌아올 것이고 오히려 요즘은 연애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다며 당분간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않다고 그랬다.
26살까지의 나는 요즘여자..아니 그 나이 때의 여자답지 않게 보수적이고 정조관념이 투철한 아가씨였다.
덕분에 미팅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고, 학교 남자선배가 슬며시 어깨에 손이라도 올릴라치면 그 다음부터 그 선배를 피해다닐 정도였다.
무엇이 나를 그리 얽매었는지 나는 여자친구들끼리 있을 때가 훨씬 편했고 재미있었으며 남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는 불편했다.
그러니 26살이 될때까지 연애라는 걸 해본 적도 없었고 남자와 키스는 커녕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었다.
누가 나를 좋다고 따라다닐라치면 스토커 취급을 했으며 친구의 손에 의해 전해지는 편지는 보는 앞에서 찢어버렸다.
그랬기에 나는 내가 결혼을 해서 한 남자랑 7년넘게 살고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당신, 내 속을 얼마나 태웠는 줄 알아? 제대로 한번 만나주길 하나.. 만나면 저녁만 먹고 집에 간다고 일어서버리지..어찌나 튕기던지 내가 당신땜에 마신 술값 모았으면 집을 한 채 샀겠다.."
7년을 같이 산 마누라가 그때처럼 자기 몸에 손도 못대게하고 어찌나 데면데면구는지 남편은 옛날 생각이 나는듯 지난 얘기들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