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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또 남푠 이야기


BY 꿈꾸는 아줌마 2009-04-14

* 거의 두 달만에 썼어요. 앞의 내용을 읽지 않아도 어쩌면,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을걸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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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또 남푠 이야기

 

양평으로 출장 간 남푠은 5일 동안 두 통의 전화가 전부였습니다.

그 두 통의 전화 내용도 다섯살 아이의 안부 뿐이었습니다.

 

"차올이 잘 놀아?"

"응."

"착하네."

"안 힘들어?"

"응. 힘든 일은 없어. 끊어."

 

연애할 때도 하루에 한 번, 1분 이상 전화 통화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죠.

가장 긴 통화는 30분이었는데 그 날은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연애시절의 남푠의 성격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서

헤어지자고 말하던 전화 통화였거든요.

그런 남자가 뭣이 좋아서 결혼까지 했는지, 정말로 내 얼굴을 꼬집으며 미쳤다 미쳤다만 반복하며

지낸 신혼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견딜 수 없었던 남푠의 무뚝뚝한 성격이, 10년이 지난 지금은 세월의 축복인지 그럭저럭 참아지고 있습니다.

남푠의 본질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을 상처를, 내 귀를 막고 마음을 막아서 침입하지 못하게

방어하는 기술이 늘었다고 할까요, 남푠과 2분 이상 길게 통화하면 이제는 내가 조바심이 나고 듣기가 싫어져서

바쁘니까 얼른 끊자고 합니다. 남푠과 전화를 끊으면 그제서야 마음의 평온이 올 지경이 되었네요.

 

전화를 끊을 때도 "그래, 잘 자고...내일 즐겁게 지내고.." 뭐 이런 감미로운 멘트 따윈 당연히 없습니다.

본인이 "끊어"라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전화를 끊는 사람이라서 할 말이 더 남았던 상대방의 말꼬리는

철컥, 잘리기 일쑤죠. 전화 예절을 새로 배워야 할 만큼 인간 감성에 대한 배려가 없는 남푠이, 어쩌면

직업을 열 번 잃었던 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독히도 성실하고 단정하며 깔끔하지만, 타인의 감성을 읽을 줄 모른다면.

 

"언제 와?"

"글쎄.......내일....?"

"일이 더 남았어??"

"응, 그렇긴 한데...언제는 우리가 확실히 알았나, 가라면 가지."

"차올이랑 내가 당신한테 갈까?"

"여길 온다고? 어디서 잘건데?"

"뭐, 잘 곳 없겠어?"

"와서, 직원들 밥 해주려고?"

"밥? 밥도 해야 돼?"

"직원 부인이 온다 그러면 식사라도 차려줄까, 기대하지 않겠어?"

"......난 당신 보러 가는건데..?"

"집에서 보면 되잖아."

"집엘 와야 말이지."

"내일이나 모레 갈거야."

"........"

"차올이는?"

"옆에서 블럭 놀이해."

"착하네."

"착하진 않아."

"그 정도면 착한거야, 애들이 다 그렇지."

"알았어, 얼른 끊어."

 

전화 통화가 2분이 넘으려니까 본능적으로 내가 조바심이 납니다.

겨우 2분으로 어색해지는 우리 부부.

 

지독히 성실하고 단정하며 깔끔한, 그 것 뿐인 남푠에게, 타인의 마음을 읽을 필요가 없는

지금의 직업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좋은 직업일지도 모릅니다.

 

새벽 몇 시라도 벌떡 일어나 첫 시외 버스를 타고 회장님의 집까지 갈 수 있는 성실함,

시간이 비는 틈틈히 야무지게 차량 점검을 하는 부지런함,

BMW 헤드라이트에 붙은 작은 나뭇잎 조차 허용하지 않는 단정함,

하루에도 3~4번씩 깔개발판을 털어내는 깔끔함,

회장님의 지시대로 군더더기 없이 운전을 하거나 잡무를 수행하는

지금의 직업 때문에 몸이 혹사 당하고 월급은 변변찮아도

어쩌면, 남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타 회사 동료 기사가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요.

 

"제수씨, 그 회사 기사는 정말 보통 힘든게 아니예요, 진짜 차올이 아빠니까 버티지, 왠만한 사람 못 버텨요.

나도 운전기사지만...나더러 그 회사 하라그러면....차올이 아빠처럼 잘 할 자신 없어요."

 

그 회사에서 버티고 있는게 칭찬인지 비웃음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동료가 추켜 세워줘도 살갑게 대꾸하지 않고 안 들리는 척 멍하니 먼 산 보고 있는 남푠을 보니

그 힘든 곳에서도 잘 견뎌주고 있으니 고마울 뿐입니다.

 

가족을 부양하느라 양평에서 5일을 보내고 온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남푠을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남푠에 대한 존경심이 피어올랐습니다.

 

수없이, 이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던 남푠이었지만,

지금은 나와 아이를 살 게 하려고 저렇게 흙투성이가 되었구나,

싶어서....10시가 넘어 아이를 재우지 못한 채, 늦은 저녁상을 차려야 할 때마다 솟아오르던 짜증도

흙투성이 남푠 앞에서는 수그러 들었습니다.

 

살아야겠다, 산만하게 날뛰는 다섯 살 차올이와 호시탐탐 이혼할 궁리만 했던 나,

그리고 흙투성이 남푠과 살아야겠다, 고 목이 메이게 다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