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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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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내 이야기


BY 꿈꾸는 아줌마 2009-02-22

 

그러다 유명 하이틴 시집 전문 출판사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마침...디자이너가 필요하긴한데...표지디자인 가능해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션..쿽..이런 거 다룰 줄 알아요?"

"네 ! 물론이예요, 시각디자인 전공했습니다."

"뭐..전공했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닐테고...경력은 좀 있어요?"

"직장 경력은 없지만, 대학때 사보제작 실습도 했고 공모전 수상 경력도 있..."

"아니아니, 그런거 말고...실제로 출간될 도서를...어디 학교 나왔어요?"

"네, 며칠 전에 00대학 졸업했습니다."

"00대학?? 거기가 어디...아,아, 2년제~..음..미안해요, 우린 4년제 이상을 원해요."

"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먼저 보시면 안될까요?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출판사는 서울 어느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습니다. 단독주택을 개조한 작은 사무실이었죠.

카펫을 깐 바닥은 아늑했지만 오래된 형광등들은 가물가물 했어요.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어요.

어딘지 굼떠 보이는 실장이라는 남자만 혼자서 무표정을 나를 맞이하고는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검사했습니다.

"음.........직접 한거예요?"

"네 !"

"음.......이게...이게..음...좀 약한데...이 정도로는 잘 모르겠는데....음...."

실장은 옆에 준비해둔 표지가 없는 시집을 보여주면서 말했어요.

"이 시집이 이번에 출간될 시집인데....아직 표지를...이 시 내용들이..참 애절하고...00씨도 한 번 읽어봐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어보게 해서....아이디어도...얻고...중.고등 동생들이 읽어보면..더 좋긴한데...

그리고... 이 시집에 맞게 ...자유롭게 샘플표지 만들어서..다시 오면...어때요?"

"네 !!! 한 번 해보겠습니다 !!! "

 

얼마나 신이 나던지요, 드디어 일거리가 생긴건가, 이걸 잘해가면 드디어 취직이 되는건가 !

회사가 좀 작지만 그래도 어때, 나름 유명한 시집을 출판하는 곳인데, 인쇄소는 따로 있나보네,

내용은 좀 유치하지만 그래도 한 때 내가 재밌게 읽었던 시집을 만든 곳이라니,

그 시인이 쓴 시집의 표지디자인을 내가 하다니...

그래, 꿈은 이렇게도 이뤄지는거야...

 

집에 와서 시집을 단숨에 읽고는, 떠오르는 이미지를 잡아서 스케치를 하고 컴퓨터에 깔려 있던

일러스트레이션와 포토샵을 이용해서 표지디자인을 했죠.

그 시집의 대표 '시'는 이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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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바이러스

 

- 한서정

 

혹시 그대, 사랑에 걸렸나요

고개 돌려 기침하지 말아요

그대 마음에서 튀어나오는 바이러스 내가 잡아줄게요

 

혹시 그대, 사랑에 열이 나나요

차가운 수건 머리에 얹지 말아요

그대 뜨거운 심장에서 뛰고있는 바이러스 내가 식혀줄게요

 

혹시 그대, 정말로 나를 사랑하나요

그렇다면 손을 닦지 마세요

내 불결한 손에 옮아도 괜찮아요,

그대가 키워준 사랑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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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시집이 내 표지디자이너 생활의 데뷔작이 된다면, 시가 유치해도 참을 수는 있었어요.

유치한 시를 유치해 보이지 않도록 표지를 잘 꾸미는 것도 표지디자이너의 실력이므로

최선을 다했죠. 두 연인이 마주보고 있고, 남자가 '치료'를 뜻하는 병원 표시가 그려진 하트 풍선을

여인에게 두 손으로 정중하게 주는 그림을 그리고, 연인 주변으로 그 하트 풍선들이

사랑스러운 색감으로 날아다니는 장면을 연출했어요. '사랑스러움'이 포인트였죠.

 

다시 출판사를 찾아가서, 표지를 보여주자 그 굼뜬 실장은 역시나 무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풍선...좀 유치한데...뭐 획기적인 아이디어는...없나요...음....좀 부족한데...음...직원들과 ..상의해 볼게요..

다시 연락할...참, 시집은 어땠...나요?"

"네?? 아직 시집 안 갔는데요, 미혼입니다 !"

"아..그게 아니고...이 책...한서정...신간....시집 내용은 어땠나요..?"

"네....그 동안 한서정씨가 썼던 시들과 비슷하고.."

"..비슷...음...중.고등학생들이...좋아하던...가요??"

"...주변에 중.고생이 없어서...저 혼자만 읽었습니다."

"혼자요? 음.....반응이 어떤지 궁금...했는데..그랬군요,..그랬군요..내가 이 시집을..출간 전에..알아볼..

그래요..그래요..어쨌든,..00씨가 해온 표지는..이 시집과는..잘 안 맞는 것 같아서...

다시 ..연락할테니...수고했어요."

"네...그럼 저는...불합격인가요??"

"아니 뭐..다른 직원들과 상의를 해보겠지만..아무래도..우리 출판사에서는...경력자를 뽑는게..낫겠어서..

아직 뽑지는 않았지만...좀 더 구인광고를 해보고...아무튼, 서둘러 이 시집 출판도 해야하고..."

 

그러고는, 당연하게 그 후 연락은 없었어요.  연락이 올거라는 생각도 안했으므로 그 출판사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직장을 구하기 위해 노력 많이 했습니다. 인터넷 인쿠르트 구인란은 물론이요, 일간지 인재채용란은 빠짐없이 봤습니다. 이력.자기소개서 출력 횟수는 점점 늘어나 50여장을 넘어섰어요.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건 대학 동창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간간히 취직에 성공한 동창들은 반가운 인사 끝에 "그런데 너 보험 설계 받아보지 않을래?"라고 물어봤어요.

취직도 못한 친구에게 '보험 설계'를 권유하는 친구들의 마음은 얼마나 절박할까, 싶어서

얼마든지 보험 설계 상담을 받았죠. 그렇지만 그 상담은 계약으로 이뤄질 수 없었고 친구들은 도와주지 않아서

섭섭해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누가 누구를 도울 수도 없는 그 현실이 참 슬펐었죠.

 

나도 취업이 몇 번은 성공했었습니다. 인터넷과 일간지 구인광고에 눈을 박고 매일매일 체크하며 이력서를 제출한 결과, 'sbc 방송국 영어교재 편집부', 'RG 화학 광고기획부', '**공단 광고편찬국'. 에 합격하여 일주일 이상씩 출근했었죠.

부서상관없이 50여명 정도의 사원을 뽑아놓고 사원교육을 시키는, 이 세 곳의 공통점은 이랬습니다.

 

" 수습기간이 끝나면 원하는 부서로 배치하겠다,

그런데 여러분이 어떤 부서에서 일하든, 소비자의 심리는 꼭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원교육의 일환으로 영업관리를 한달씩 해보자, 여러분은 전문 영업사원이 아니므로 매출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실적에 따라 원하는 부서 배치 우선권이 주어진다.

자, 젤 먼저 가족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해봐라. 가족들이 여러분을 생각하는 마음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사원교육을 받았던 휘황찬란한 조명 반짝이는 회의실 불은 꺼지고,

싸구려 형광등이 길게 달려 있고 싸구려 책상 위에 수십대의 싸구려 전화기가 올려져 있는 옆 사무실로

신입사원들을 데리고 갔어요.

 

"자, 여기서 여러분의 미래를 만들어 보십시오 !!"

자신있게 말하는 이 세 곳의 박부장님들의 역겨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조용히(사실은 소리소리 지르며 대판 싸우고 싶지만)...가방을 들고...건물 밖으로 나왔었습니다.

 

이런 생활이, 겨울내내 2월말까지 이어졌습니다. 나중에는, 구인광고 문구만 봐도 여기 회사이름만 바꿔서 다시 광고냈구만..........판가름 할 능력도 생기더군요.

 

그리고, 3월초.........'학습지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이력서 냈더니 바로 채용하고 다음날부터 기존 선생님 수업을 따라다니며 배우라고 하더군요. 자가용이 없으면 다니기도 힘든 동네를 배정해주길래..또 조용히 사표 쓰고 나왔습니다.

 

1998년 4월 1일, 드디어 동네 '미술 학원'에 선생님으로 취직 되었어요.

원장선생님과 나, 아이들 50명, 먼지가 뿌옇게 쌓인 30평의 실내, 낡은 교구들과 다 벗겨진 페인트칠,

학원 봉고차와 운전하시는 원장선생님 남편, 그리고 월 50만원 월급이 전부인

'정직 미술 학원'에서 첫 직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첫 달은, 1년 뒤에 퇴직금 형식으로 준다면서 10만원을 제하고...40만원을 첫 월급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첫 월급을 받은 날 부모님 선물을 사고 내 책을 사려고 서점에 갔다가

'한서정 시집 - 사랑 바이러스'를 보고 말았습니다. 표지에 두 연인이 하트 풍선을 맞잡고 있더군요.

연인 주변에 하트 풍선은 떠다니지 않았지만, 두 연인 발 밑에 병원 기호가 그려진 하트 풍선들이 눈 처럼 쌓여 있네요.

이 시집이..출간되었네요. '베스트셀러'란에 있네요. 양지연. 모르는 이름이 표지디자인을 했다고 써 있네요.

내가 만들었던 표지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그 야릇한 시집 앞에 서 있었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첫 월급 40만원을 넣은 손가방과 부모님 선물 가방을 두 손에 들고, 시집 앞에서 울고 있었네요.

아, 그 때..'시집이나 갈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1998년 4월의 대한민국의 어린 젊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사회에 첫 발을 내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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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푠 이야기를 더 써야 하는데, 아내 이야기를 길게 썼네요.ㅎㅎ

다음 편부터는 다시 남푠 이야기가 펼쳐 집니다 ^^;;

 

* 끝 문장은, 2008.2.22.일.밤에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