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푠과 결혼한 지 딱 10년이네요.
10년간, 강산이 변했나요?
변했네요, 강산은 자꾸 오염되고 도시는 폭발 직전이니까요.
그렇지만 10년 전에도 강산은 오염되어 있었고 도시는 폭발 직전이었죠.
그때도 환경단체에서는 강산을 살려줘야 사람도 살릴 수 있다, 했고
도시는 두꺼운 목화솜 이불같은 까만 스모그가 압사당하지 않을만큼 누르고 있었어요.
그리고 IMF.
우리는 그때, 어린 젊음들이었어요.
IMF로 회사원의 절반이 직장을 잃는 시대였죠.
기업에서는 더 이상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어요. 뽑아봤자 죄다 '경력자 우대'였죠.
이제 갓 졸업한 사람이 무슨 경력이 있나요. 경력을 쌓을 기회를 줘야 경력자도 되는거죠.
1998년 2월,
전문대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갓 졸업한 22살의 나는,
발가벗겨 문 밖으로 내쫓긴 기분이었어요.
그래도 나는, 내 재능을 믿었죠.
내 재능이라면 망해가는 광고회사도 살려낼 수 있을 것만 같이 자신감이 눈에서 빛을 뿜게 했죠.
이 나라에서 내노라하는, 유명 광고기획사에 이력서를 내밀었어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신문 형태로 만들었죠.
1면에 '그녀가 졸업하다 !"라는 제목을 쓰고 날카로운 표정의 사진을 크게 붙이고 소개글을 썼어요.
2면에는 '심층탐구, 그녀의 디자인 세계'라는 제목을 단 글을 쓰고
교수님의 추천글도 실었죠. 하단에는 박스광고도 빼놓지 않았어요.
" 저는 멀티인재예요. 또래보다 그림을 잘 그려서 미술을 시작했고, 발상의 전환을 사랑해서 디자인을 선택했죠.
예술적 감수성을 문학으로 해소했으므로 글로 받은 상장도 미술 상장만큼 받았죠.
사진 솜씨도 쓸만해요. 교내 사진 공모전에서 최우수상 받았습니다.
손으로 하는건 뭐든지 잘해요. 손뜨개.십자수.가위질.바느질.종이접기.풀질. 손이 좀 빠르죠.
설거지도 남들 두 배 속도로 해요. 못질도 아빠보다는 잘해요.
그러니 나를 일꾼으로 뽑아주시면, 열심히 일 할게요 !"
충만한 자신감으로 이력서를 내밀었는데 아뿔사, 내가 참 미련했네요.
그 회사 지원한 전국 대학 수백명 졸업생들 중 누구는 그림을 못 그리나요? 누구는 손재주 없겠나요,
누구는 발상의 전환을 사랑하지 않겠나요?
학교에서 교수님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진짜로 나만 잘하는 줄 알고 오만함도 같이 재능으로 키웠네요.
내 디자인 재능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은 아니었는지, 이름 좋은 회사는 서류에서 줄줄이 낙방이었죠.
경력자를 우대해서 뽑겠다는데, 신입은 겨우 몇 명 뽑는다는데
그 틈에 낄 재능은 제게 없던거죠.
이름 좋은 회사들에서 거절당한 저는, 그제서야 '빛'이 나던 눈에 '불'이 번쩍 났어요.
집에 들어 앉아서 그 신문 형태 이력.자기소개서를 스무 장을 출력했어요.
그리고 집에 있는 시집, 잡지, 소설책들 뒷장에 적힌 출판사 전화번호를 A4 종이에 빼곡히 썼습니다.
전화를 했어요, "사원 모집 언제 하나요?" "현재로는 계획 없습니다."
전화만 하면 "계획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통에, 전화를 끊어도 환청은 계속 들렸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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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청소하고 이웃과 점심 먹고 올게요.ㅎ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