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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푠 이야기


BY 꿈꾸는 아줌마 2009-02-16

1. 남푠 이야기

 

1) 남푠의 직업

 

"5일 동안 있어야 한다고? 난 그 말은 못 들었는데.

그래도 2~3일에 한 번은 집에 와야지. 그럼 짐 챙겨야겠네.

알았어, 낼 5시 30분에 만나."

 

일요일, 우리 가족은 콧잔등이 금새 얼어버리는 2월의 끝겨울 날씨에도 문화 생활을 하겠다고

'예술의 전당 - 렘브란트를 만나다.' 전시회에 가는 중이었어요.

낮 12시가 넘었으니, 점심을 먹고 가자는 남푠의 말을 따라

양재역 만두집에서 고기만두, 김밥, 쫄면을 씹고 있을 때 남푠이 전화를 받더군요.

 

전화를 끊고도 무슨 전화였는지 얘기하는 법이 없는 남푠.

'5일 동안'이라는 말이 귀에 남길래, 남푠이 싫어하는 '꼬치꼬치 묻기'를 시작했습니다.

 

"5일 동안 어디 가?"

"응. 양평."

"출장이야?"

"응."

"5일 동안 집에 안 와?"

"그럴 것 같은데...가봐야 알겠지."

"그럼 회장님은?"

"안가. 기사들만 가."

" !!! "

 

그래요, 우리 남푠은 '회장님'의 '개인 운전 기사'예요.

중소규모 건설회사의 CEO 의 BMW를 몰아주는 개인기사.

5살 아들을 둔 서른 일곱살의 아빠의 직업은 개인운전기사예요.

 

"회장님은 왜 안 가셔?"

"여기서 다른 볼 일이 있으니까."

"그런데 왜 기사들이 양평에 가?"

"회장님 수행할 운행스케쥴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기사들이 회장님들도 없이 왜 양평엘 가냐구."

"그럼 놀아?"

 

늘 질문과 대답이 따로국밥처럼 한 뜻으로 어우르지 못하는 이 답답한 상황,

이 답답한 대화노선 때문에 난 남푠에게 10년간 분노를 느꼈었요.

 

"내가...운행 없으면 놀라고...물어본 게 아니잖아..

양평에서 무엇을 하길래 오너들 없이..기사들이 거기에, 5일씩이나..있어야 하는지..

그걸 묻는거야."

 

어제 같았으면, "그럼 놀아?"라는 남푠의 말에 있는 힘껏 눈을 짜려주고 밥이나 먹었을텐데

'5일 동안'이라는 말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나는, 부글거리는 뱃속을 잠재우고

천천히 다시 물어봤어요. 남푠도 머쓱했는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하네요.

 

"새로 짓는 별장마을...조경작업을 하거든. 조경회사에서 5일간 작업을 하는데,..

계열 회사 기사들..운행 없으니까..가서 일 도우라고."

"일 도우라고??? 현장 감독하는게 아니고, 일 도우라고? 무슨 일을 어떻게 도우라고??

 

일을 도우라고 했다네요. 남푠의 회사에서 건설하는 별장마을에 조경작업을 하는데,

조경회사 직원들을 도우라고 했다네요. 양평에, 5일동안.

개인기사들이 오너들의 자잘한 심부름을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요.

명절마다 선물상자들을, 오너가 지시한 집집마다 혹은, 시민단체마다 돌리고 와야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사모님이 개인 일로 어디가신다고 하면 댁으로 가서 태워서 목적지까지 태워다주는 수고를 마다하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오너가 주말에 사업상 골프를 치러 가거나 해외출.입국을 할 때에도

전화가 오면 김치찌개에 저녁밥을 먹다가도 김치찌개 속 돼지고기를 마저 씹으면서 신발을 신는 일도

종종 벌어졌으니까요.

 

그래도 남푠은, 신경질 한 번 부리지 않을만큼 멍청하고 성실한 일꾼이죠.

저도 그 멍청한 남푠의 아내답게, 아직까지는 신경질을 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5일동안'이란 말은 씹고 있던 쫄면을 내장 속에서 꼿꼿하게 서있게 할 만큼

신경 거슬리는 자존심이었습니다.

남푠에게 어떻게 다시 말을 걸어야할까, 찬찬히 고민했어요.

 

"여보...혹시, 회사에서 부당한 일도 시켜?"

"그런거 없어."

"본업 외에......."

"왜, 사람 부려먹을까봐?"

 

남푠은, 왠일인지 눈까지 맞추고 말을 했어요. 10년을 살면서 좀체로 눈을 맞추는 일 없는 남푠이

무슨 비장한 말을 하려고 눈까지 맞출까.

 

"사기치는 거, 도둑질하는거 아니면, 시키는 일이라면 다 해야지.

막말로 노가다 시키면 노가다 해야지, 건설회사니까 시킬 수도 있고."

 

쫄면은 이미 불어터졌습니다.

워낙 보수적이고 감성없는 남푠이

'미국소고기 위험하지 않아. 다 야당에서 선동질한거야.'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을 때

받았던 충격...이 떠올랐습니다. 한달전, 남푠이 추천해서 간 갈비탕집에서 내가 '원산지 : 미국'을 보고

입맛을 떨구자 나를 타이르듯 얘기했었습니다. 내가 '선동질이 아니야.'라고 말해도

남푠은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믿을 음식 하나 없어. 멜라민, 화학조미료, 중국산 식품 그건 안전해?"하며

나를 한심하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내가 반절도 못 먹은 갈비탕을 가져다가 마저 다 먹으며

"맛만 있네."하는 남푠을 보면서...'미국소'를 '맛'으로 평가하는 이 사람이,

과연...가족을...지켜줄 수나 있을까, 나는 미국소는 물론 남푠을 믿지 못하겠는데

이젠 정말로 이혼해야하는게 맞지, 않나 진지하게 고민했었습니다.

 

"노조가 있다면...양평 조경 작업을 돕지 않아도 되겠지.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근데, 기사들은 그런 것도 없고....자주 만나는 기사 중에 60세 형님이 계신데...

그 분은, 아침에 사장님 댁으로 출근하면...꽉 채워진 쓰레기봉투도 치워. 음식물 쓰레기도 버려주고."

 

다시 뱃속이 부글거렸어요. 만두와 쫄면이 올려진 식탁을 탕 ! 치고 분노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러면..남푠이 얼마나 자기 직업에 수치심을 느낄까, 싶어서

쫄면 그릇에 눈을 꽂았어요. 목이 메이네요.

 

"그게...다, 생각하기 나름이야. 그런 일까지 하는 걸 더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치만 그 형님은, 좀 더 성실하게 하기 위해 서비스를 한다고 생각할 걸."

"여보,....그건...서비스가 아니라......머슴이야."

 

나는, 그 60세 형님께는 정말로 정말로 죄송하지만 기어코 '머슴'이라는 표현을 했어요.

곧 죽어도 '직업의 귀천은 없다, 사람에게 귀천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나라서 '머슴'이란 표현은

남푠의 자존심까지 꺽는 말이라는 거라서..아주 조심스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안 그러면, 직업을 잃어."

 

나는 이제,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직업을 잃는다', 는 말처럼 내가 무서워하는 말은 없기 때문이지요.

남푠의 직업, 네..저는, 남푠의 직업을 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시작했어요.

10년을 살면서 열 번은 더 바뀐 남푠의 직업. 바꿔 말하면, '열 번은 직업을 잃었던' 그 말들을 하고 싶어서요.

왜 내가 '직업'이란 낱말에 예민해졌는지도.

 

남푠은, 만두를 다 먹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산만하게 구는 5살 아들 녀석의 머리를 한참 쓰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예술의 전당'에서 '렘브란트'를 만나는 내내 잠든 아들을 어깨에 메고 그림을 감상하네요.

남푠은 판화의 일종인 '에칭' 작품들 중 '헝클어진 머리의 자화상' 앞에서 한참 서 있었어요.

작품속에서  화가가 보일 듯 말 듯 작게 쓴 이름과 연도를 보고 감탄하는

남푠을 보니 묘한 연민이 밀려왔습니다.

이 사람을, 정말로 평생 남푠으로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지..갈등도 함께요.

 

그렇게 일요일이 지나고, 오늘 월요일 새벽 5시.

해도 뜨지 않았는데 남푠은 등산 가방에 짐을 꾸리고, 등산복 차림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잠결이라 인기척만 느꼈어요.

왠일인지, 내 머리맡에 앉아서 내 머리를 한참 쓰다듬다가 "갔다올게." 혼잣말 하고는 현관문 밖으로 나가네요.

내 눈은 감겨 있었지만, 눈을 맞춘 기분.

 

어렴풋이 엘리베이터의 "내려갑니다." 소리가 들리고 그제서야 저도 잠에서 깼어요.

옆에 누워 있는 아이를 한 번 보고, 천정을 보는데...왠지 눈물이 나네요.

천정을 보면서 이유없이 울었습니다.

눈물이 자꾸만 나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2009. 02. 16.

꿈꾸는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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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소설'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