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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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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


BY 하윤 2008-10-21

 

*마중


그녀는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20분이었다. 아까 남편과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가 10시 35분이었다. 남편은 그때 분명히 곧 내릴 거라고 했다. 그런데 40여 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편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전화도 안 받았다.

한낮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8월 중순의 밤공기는 텁텁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다들 한 번씩 흘깃거리곤 육교를 향해 걸어갔다. 야심한 시각에 그녀 혼자 텅 빈 정류장을 지키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육교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육교는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있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층계를 세며 올라갔다. 32개였다. 맞은편 층계로 또 천천히 내려갔다. 역시 32개였다. 그녀는 그 동작을 반복하면서 남편에게도 계속 전화를 걸었다. 

마침내 남편이 전화를 받은 것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자다 깬 목소리였다. 여태 생고생만 시킨 사람의 목소리치곤 너무 태연해서 그녀는 약이 바짝 올랐다.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해 주리라던 결심도 싹 사라졌다. 그녀는 정류장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곧 내린다던 사람이!”

“으응, 이제 내릴 거야. 아깐 내가 잠결에 착각했나 봐.”

“착각 좋아하시네. 자꾸 거짓말만 할 거야?”

밤에는 천호동에서 집까지 1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껏 기다린 시간만도 족히 1시간은 넘었다. 남편은 차에 타지도 않은 상태에서 곧 내릴 거라고 대충 둘러댔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자 그녀도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그녀가 회식 중인 남편에게 30분 간격으로 줄기차게 전화만 안 했어도 남편이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사실 그녀는 밖에 나가 있는 사람한테 자꾸 전화하는 걸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공사가 끝나고 돈을 받는, 오늘 같은 날은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통장으로 넣어주는 게 대세인 요즘, 임금을 무조건 당일에 현찰로 주는 데다 돈 봉투를 손에 쥔 사람한테 술까지 사 먹이는 십장의 행태에 그녀는 매번 방방 뛰었지만 소용없었다. 그건 그들의 오랜 관례라고 남편이 말했다. 한 번은 동료 중 한 사람이 집에 가다가 그날 받은 돈을 몽땅 잃어 버렸는데, 다음날에야 술이 깬 그는 어디에 흘린 건지 누구한테 뺏긴 건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단다. 그러면 다들 몸을 사릴 만도 한데 결론은 참 엉뚱하게 났다. 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은 또 술판을 벌인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 무식한 전통에 맞설 힘이 없는 그녀로선 그저 전화라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1119번 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천호동에서 집까지 바로 오는 버스는 1119번과 1-4번뿐이었다. 방금 한 말대로라면 남편은 저 버스에 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 중에 남편은 없었다.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받았다.

“자기 몇 번 탔어? 방금 1119번 지나갔는데.”

“응, 조금만 더 기다려. 난 1-4번 탔어.” 

그제야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정말로 1119번과 경주라도 하듯이 1-4번 버스가 뒤따라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육교 오르내리는 걸 멈추지 않았는데, 마침 그녀가 육교 위에 있을 때 버스가 도착했다. 그녀는 느긋하게 층계를 내려갔다. 그런데 내리는 사람은 달랑 3명인데, 이번에도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또 한 번 머리끝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이미 저만치 달아나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그녀는 또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 눌렀다. 한참 신호가 가고 나서야 남편은 전화를 받았다.

“자기 지금 어디야? 왜 안 내려? 버스 방금 지나갔단 말이야!”

“뭐? 정말? 아, 이런.......”

남편의 탄식과 함께 전화는 툭 끊겼다. 그녀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남편이 그 짧은 순간에 다시 잠이 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또 그녀가 쓸데없이 육교에서 서성대지만 않았어도 버스에서 남편을 끌어내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것도 기가 막혔다. 곧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렸어?”

“응, 내리긴 했는데.......”

남편의 목소리는 풀이 팍 죽어 있었다.

“근데?”

“급하게 내리다가 지갑을 흘렸나 봐.”

“뭐?”

정말 산 너머 산이었다.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남편은 일단 그녀가 있는 쪽으로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떤 경우에도 마음부터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결혼 전 그녀의 자취방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그녀가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세간은 이미 잿더미로 변해 있었고,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때 그녀는 마치 남의 방에 불이 난 것처럼 담담하게 사태를 수습해 나갔는데, 그 침착한 태도는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그만큼 그녀는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속도가 빨랐다. 하지만 그들은 불이 난 지 꼭 한 달 만에, 한밤중에 불현듯 깨어난 그녀가 밤새 통곡한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상처가 생기면 일단 봉합부터 한 뒤 두고두고 후유증을 앓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지금 가장 겁내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남편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좀 전과 달리 남편의 목소리는 싱싱하게 살아나 있었다.

“자기야, 방금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는데 내 지갑 거기 있대. 와서 찾아 가래. 그러니까 자기도 이쪽으로 좀 내려와.”

“그래?”

뜻밖에도 그녀의 반응은 시들했다. 이미 놀랄 만큼 놀란 데다 지갑을 찾는다 해도 돈이 무사할 것 같진 않았던 것이다. 주로 교통카드 용도로 쓰고 있는 신용카드야 분실신고를 하면 되니까 못 찾아도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쁘기는커녕 이 밤에 결국 파출소까지 가야 하나 싶어 귀찮고 서글프기만 했다. 그녀는 힘없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마중을 나가기 시작한 것은 3년 전 남편이 막노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남편이 일찍 들어오는 날은 아이들이 주로 달려 나갔고, 술 먹고 늦는 날은 그녀가 전담했다. 집에 퍼질러 있다가 한 번씩 나가려고 하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어서 그녀는 가끔 머리를 감는다거나 찌개가 끓고 있다는 핑계를 대고 안 나가기도 했다.

한 번은 남편이 내리 사흘을 술에 절어 들어오기에, 그녀는 전화기에다 대고 앞으로 마중은 꿈도 꾸지 말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남편은 술이 취해 걸을 수가 없다느니 가방이 너무 무겁다느니 하며 온갖 불쌍한 척을 다 했지만 그녀는 전화를 탁 끊어 버렸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몰래 골목 끝까지 나가 보았다. 마침 고개를 푹 숙인 남편이 저만치서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연장이며 작업복이 든 가방이 지그재그로 걷는 남편의 어깨에서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참 쓸쓸해 보였다. 그녀는 슬그머니 남편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남편의 반응이 정말 놀라웠다. 침울하던 남편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진 것이었다. 그는 마치 잃었던 엄마를 다시 만난 아이처럼 그녀의 출현을 반가워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녀는 더 이상 마중을 안 나간다는 말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남편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웬만해선 입을 열지 않는 남편이 그때만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굴었다. 얘기래야 일이나 동료와 관련된 내용이 다였지만, 가끔 그녀에게 고생한다거나 고맙다는 말 같은 것도 했다. 남편이 했던 소리를 하고 또 하거나 다세대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밤길에서 너무 큰 소리로 떠들 때는 신경이 곤두서기도 했지만, 하루 일과를 무사히 끝낸 안도감으로 긴장이 살짝 풀린 남편의 모습이 그녀도 싫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끔 포장마차에 들러 불어 터진 어묵이나 떡볶이를 사 먹기도 했고, 동네 편의점에서 캔 맥주 하나씩을 마시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특히 오늘처럼 돌발적인 사건이 꼬리를 무는 날은 남편이고 뭐고 다 귀찮기만 했다.

그녀는 연방 숨을 몰아쉬었다. 어두운 거리에 인적이라곤 없었다. 겁이 와락 난 그녀는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편을 발견한 뒤에야 그녀는 겨우 축축한 목덜미를 닦을 수 있었다. 남편은 비굴할 정도로 싹싹 빌었다. 어울리지 않게 애교까지 떨었다. 평소에는 나무토막 같은 남편이 술만 마시면 사근사근해지는 것이 한때는 신기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에 염증이 났다. 그녀는 남편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도로 내려섰다. 

“내 뒤에 내린 사람이 곧장 파출소에 갖다 맡겼나 봐. 정말 고맙지 뭐야.”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번쩍 드는 그녀 뒤에서 남편은 아이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남편은 술을 먹고 들어오는 날이 안 먹고 들어오는 날보다 훨씬 많았다. 그날의 피로를 한 잔 술로 푸는 것까지야 그녀도 반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가. 뿌리 깊은 전통을 자랑하는 사람들답게 그들은 마셨다 하면 뿌리를 뽑아야 했다. 집결지인 천호동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야 늦게까지 마셔도 상관없었지만, 남양주에 사는 남편은 사정이 달랐다. 그런데도 고지식한 남편은 술자리 도중에 빠져 나오는 짓 같은 건 절대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늘 남편이 막차를 놓칠까봐 전전긍긍해야 했다.

하지만 막차를 탔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남편은 차만 타면 잠이 들었다.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피로와 술기운까지 겹쳤으니 어떤 장사라도 그 순간에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는 없을 거라고, 처음 몇 번은 그녀도 이해하고 넘어 갔다. 하지만 남편이 버스 종점까지 가선 심야택시를 타고 되돌아오는 일이 다반사가 되자 더 이상 참는 건 불가능했다. 택시비는 보통 3만원에서 많을 때는 5만원도 나왔다. 항상 집에 그만한 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한 번은 기사와 함께 현금지급기를 찾아 헤매기도 했고, 또 한 번은 다음날 내야 할 아이들 급식비를 내준 적도 있었다. 택시비만 날린 게 아니었다. 남편이 버스에서 잃어버린 휴대폰만 해도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남편이 그렇게 한 번씩 사고를 칠 때마다 그녀의 반응도 다양하게 변해 갔다. 처음에는 남편과 당장이라도 끝낼 것처럼 마구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게 먹히지 않자 그녀는 진이 빠져 한동안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그래도 달라지는 게 없자 남편을 붙잡고 눈물로 애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을 써도 횟수만 좀 줄 뿐 근본적인 문제는 고쳐지지 않았다. ‘내가 한 번만 더 실수하면 사람이 아니라 개’ 라고 하면서도 남편의 맹세는 번번이 며칠을 못 넘겼다. 술을 끊는 것 말고는 해결책이 안 보였다. 하지만 자기더러 술을 먹지 말라는 말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과 똑같은 선고라고, 남편은 잘라 말했다. 술자리에서 모든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 일이 성사되는 노동판의 생리를 감안해 보면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냈다. 남편이 미리 버스를 탔다고 알려 주면 그녀가 내릴 시간을 계산하고 있다가 전화로 깨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한 번 잠이 들면 그 전화벨소리도 못 들을 때가 많았다. 도착할 시간이 다 됐거나 아니면 훨씬 지났는데도 남편이 계속 전화를 안 받을 때면 그녀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30분이고 1시간이고 끝까지 휴대폰을 들고 있자면 귀와 손이 저려 오고 나중에는 신호음 소리마저 그녀를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도 차마 휴대폰을 집어 던질 수는 없었다. 빈손보다는 휴대폰이라도 들고 불안에 떠는 게 그나마 나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가 그토록 조바심을 내는 데에는 금전적인 손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바로 남편의 건강이었다. 남편의 평균 수면시간은 하루 4시간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직도 안 들어오면 잠은 언제 잘 건데?’ 하는 소리를 달고 살았고, 남편이 아무리 늦게 들어 와도 잔소리는커녕 무조건 잠부터 자게 했다. 녹초가 된 남편이 이부자리에 눕는 걸 봐야만 비로소 그녀의 긴 하루도 끝이 나는 것이었다. 

“화도파출소로 갑시다.”

택시 앞자리에 털썩 몸을 부린 남편이 기사한테 말했다. 뒷자리에 앉은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창밖만 보고 있었다. 그들이 남남처럼 택시에 탈 때부터 안 좋았던 기사의 표정은 목적지를 듣는 순간 노골적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곤 대꾸 한 마디 없이 운전만 하더니 파출소 앞에 도착해서 남편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자 그제야 차비부터 내라며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시 차를 돌려 집까지 갈 거라고 해도 기사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기사가 좀 너무한다 싶었으나 그녀 손에도 집 열쇠와 휴대폰뿐인지라 나설 수도 없었다. 남편이 쩔쩔맬수록 기사의 불손한 태도는 점점 강도를 더해 갔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남편의 태도가 돌변했다. 남편은 지갑을 찾아 와야 돈을 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좋게 말할 땐 들은 척도 않더니 남편의 표정이 험악해지고 나서야 기사는 툴툴대면서 차를 돌렸다. 남편은 성큼성큼 파출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순경 앞에선 다시 본래의 공손한 자세로 돌아갔다. 그녀는 속으로 좀 놀랐다. 그때그때 유연하게 대처하는 남편의 행동만 봐서는 도저히 만취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을 끝내고 나오면서도 남편은 몇 번이고 순경한테 굽실굽실 인사를 했다. 한 번만 하면 되지 저렇게까지 할 건 뭔가 싶어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막노동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편이 간이고 쓸개고 다 내던진 지 오래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아예 몸에 배 버린 것 같아 그녀는 기분이 씁쓸했다. 

만화가가 꿈이었던 그녀는 내내 화실에만 처박혀 살았다. 나이 서른이 넘도록 결혼할 생각은 않고 헛물이나 켜고 있다고 사람들이 수군대도 상관없었고, 벌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수입에 하루 두 끼 라면만 먹는 생활이었어도, 그녀는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다. 남편도 거기서 만났다. 목표가 같았기에 그녀는 주저 없이 물만 떠 놓고 신혼을 시작했다.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가족들이 뜯어 말렸지만 그녀는 자신 있었다. 꿈이 있는 한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은 아이가 생기면서 곧 깨닫게 되었다. 분유가 필요한 아이한테 꿈은 굴러다니는 빈 젖병만도 못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식의 생활방식이 아이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아끼며 살았지만 둘째를 낳았을 때는 병원비가 없어 퇴원을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임신과 출산으로 그림에서 손을 놓고 있었던 그녀가 먼저 결단을 내렸다. 몇 달 일해서 우선 급한 불부터 끌 요량으로 취직을 한 것이었다. 둘째의 젖을 뗀 지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몇 달 예정이 2년을 훌쩍 넘기도록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만화계의 불황은 더욱 심해져 남편은 거의 실직 상태가 되었다. 만화가 미래에 유망한 분야라고 매스컴에서 떠들어댈 때마다 그녀는 냉소를 지었다. 그건 캐릭터사업이나 애니메이션 등에 국한된 얘기였고 출판만화는 이미 기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함께 만화를 그렸던 동료들은 하나둘 생업을 찾아 떠나갔다. 남편도 남의 원고 데생이나 간간이 하면서 집안일과 아이들 돌보는 걸로 체면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던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추석이 지나면서 날씨는 눈에 띄게 쌀쌀해졌다. 낮부터 몸살기가 있었던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자리에 누웠다. 몸이 천근만근으로 가라앉아 아이들 방을 들여다볼 기운조차 없었다. 일이 잘 되든 안 되든 밤샘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남편과는 현관에서 얼굴 한 번 마주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즈음 그녀가 남편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보다 더 냉랭해져 있었다. 혼자 돈 번다고 유세하는 것처럼 보이긴 싫었지만, 한번 삐딱해지기 시작한 심사는 그녀 스스로도 바로잡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남편이 방문 앞에서 인기척을 냈다. 

“자?”

남편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내일 일하러 가.......”

남편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침묵했다. 남편은 잠시 머뭇대는가 싶더니 그대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그녀의 가슴은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프던 것도 다 잊어 버렸다. 무슨 일을 하러 가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림 외에는 아무런 기술도 연줄도 자본도 없는 나이 마흔의 남자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란 뻔했다. 그간 생활정보 신문들이 집안 여기저기에 나뒹굴 때부터 이미 예감했던 일이었고, 내심 그녀는 어떤 변화든지 빨리 왔으면 하고 바라던 참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니 두렵고 떨리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남편한테 ‘그만 둬!’ 하고 소리쳐야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또 다른 마음 한구석에선 그냥 모른 척하라는 속삭임이 집요하게 들려 왔다. 남편은 정말로 새벽에 집을 나갔다. 남편이 나갈 때 들어온 찬바람이 현관에서 안방까지 곧장 흘러들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이불을 끌어 당겼다. 

마트에 처음 취직할 때만 해도 그녀는 희망에 차 있었다. 초봉은 약했지만 열심히만 하면 월급도 오르고 일에서 보람도 느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계산원의 시급 3천2백 원은 2년 경력자한테나 갓 초보한테나 똑같이 적용되었다. 오히려 회사에선 경력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경력자들은 요령도 잘 피우고 부정한 일도 잘 저지른다는 편견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사장은 늘 의심의 눈초리로 직원들을 쏘아 보았다. 그녀는 인격적인 대우는커녕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소모품 취급을 당하는 게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 당연히 그녀의 소망은 단 한 가지, 매일 10시간 동안 계산대 앞에 마네킹처럼 서 있어야 하는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절박한 심정에서 보자면 남편의 결심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었고, 그녀의 침묵 역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날 남편은 뜻밖에도 마트 앞에서 그녀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일당으로 받은 6만4천원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뚱해 있던 그녀의 입이 대번 함박만 해졌다. 원래 하루 일당은 7만원인데 소개비로 6천원을 뗐다고 했다. 당시 남편의 데생 고료가 한 장당 만원이었다. 만화데생이란 게 진도가 잘 나갈 때는 하루에 서너 장 그릴 때도 있지만, 한 번 막히면 며칠에 한 장 완성하기도 힘들 만큼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그러니 남편의 고료나 그녀의 시급과 비교해 봤을 때 그 액수는 정말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녀의 가슴은 대번 계란 팔러 가던 아가씨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 정도 일당이라면 며칠만 일해도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아 그녀는 팔짝팔짝 뛰었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흥분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 이전까지의 수입이 너무나 초라했던 데다 남편이 벌어온 돈을 받아본 것도 아주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그날 하루 종일 남편을 그냥 내보낸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남편을 밀어 주리라, 새로운 결심까지 했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여태 투자한 세월이 아깝고, 또 계속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남편이 내민 시퍼런 지폐를 보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자라는 아이들 생각도 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이 당분간 이 일을 좀 더 해보겠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파출소를 나온 남편이 다시 택시에 탔다. 그녀는 돈이 무사한지 궁금했지만 기사 앞이라 꾹 참았다. 택시는 단 몇 분 만에 집 앞에 도착했다. 남편은 만 원짜리를 내밀면서 거스름돈은 됐다고 했다. 그제야 내내 굳어 있던 기사의 인상이 좀 펴지는 듯했다. 그녀가 흘긋 미터기를 보니 5천원도 안 나왔다. 그녀 생각에는 자기들이 성가신 손님이었던 건 맞지만 기사 역시 불친절했으므로 요금은 그냥 나온 대로만 줘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기분이 아니어서 그냥 남편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잠깐 마중을 나간 것이 하루 종일 일한 것보다 더 피곤했다. 벽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넘었다. 신발을 벗자마자 그녀는 남편의 지갑부터 낚아챘다. 지갑 안엔 천 원짜리 2장과 몇 장의 명함, 그리고 신용카드뿐이었다. 아무리 기대를 안 했다고는 해도 충격은 컸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돈은?’ 하고 소리쳤다. 남편은 묵묵히 양말을 벗었다.

“돈은 진짜 없어진 거야?”

그녀는 쇳소리를 냈다. 남편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바지를 벗었다. 그런 다음 바지 주머니에 천천히 손을 집어넣었다. 놀랍게도 거기서 곱게 접힌 수표 몇 장이 나왔다. 남편은 그걸 그녀 앞으로 쑥 내밀었다.

“어떻게 이런 머리를 다 썼어?”

수표를 받으며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나도 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야. 너무 그러지 마.”

남편은 아이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하고는 바로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가 잽싸게 안방에서 베개를 가져 왔지만 남편은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남편은 일이 있는 날은 무조건 새벽 4시 20분에 첫차를 탔다. 그걸 타고 구리시에서 한 번 갈아 탄 다음 집결지인 천호동에는 늦어도 5시 45분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그러면 십장이 승합차를 몰고 와 일꾼들을 싣고 6시 전에는 그날 일할 현장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남편에게는 언제부턴가 바닥에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드는 재주가 생겼다. 출퇴근길 버스에서는 물론이고 새벽에 출근 준비를 끝낸 뒤에도 단 5분의 여유만 있어도 남편은 신발을 신은 채 쪼그리고 누워 잠을 잤다. 남편은 퇴근길에는 깊이 잠들어 낭패를 본 적이 부지기수지만, 출근을 앞두고는 그 반대였다. 그녀한테 신신당부를 해 놓고도 남편은 거의 대부분 그녀가 깨우기도 전에 먼저 일어났다. 그것도 잘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난리라도 난 것처럼 시간을 묻고 허둥대는 바람에 옆에서 졸음을 참고 있던 그녀가 깜짝 놀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남편을 볼 때마다 그녀는 속상하고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남편의 처지가 안타까워 속상했고, 그녀가 냉큼 직장을 그만둬 버리는 바람에 남편이 더 고생하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최소한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두 번 다시 직장에 다닐 생각이 없었다. 마트에서 일할 때의 안 좋았던 기억도 한 몫을 했지만, 만으로 세 살과 한 살, 어찌 보면 엄마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냄으로써 겪어야 했던 부작용과 아픔이 아직도 생생한 그녀로선 더 이상 아이들의 가슴에 엄마의 빈자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이중 삼중의 고통도 감수해야 했는데, 생활비가 쪼들릴 때는 물론이고 남편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다가 일이 없어 되돌아왔을 때도 웃으며 맞아야 했고, 연줄 하나 없는 노동판에서 기술이라도 익혀 보려고 남편이 몸부림 칠 때도 묵묵히 지켜보아야 했고, 금방 큰돈을 벌 줄 알았던 막일도 실은 많은 변수가 있으며, 겨울에는 동물뿐만 아니라 건설노동자들도 동면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남편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남편의 지갑을 집어 든 다음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남편이 막노동을 시작한 이후 집에 남아난 옷이나 신발이 없었던 것처럼 지갑 또한 몇 개나 갈아치웠는지 모른다. 이번 것도 벌써 10년은 쓴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가죽이 벗겨지고 네 귀퉁이는 닳아서 힘이 없었다. 내부는 더 심했다. 칸칸이 박음질된 선을 따라 시멘트가루며 먼지 같은 것이 부옇게 스며들어 있었다. 빳빳한 지폐라도 들어 있으면 좀 나아 보일 텐데, 천 원짜리 2장이 고작인 지갑은 더 슬퍼 보였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지갑을 탁탁 털어 봤지만 이미 조직 깊숙이 침투한 그것들은 꿈쩍도 안 했다. 공연히 손끝만 버석버석해질 뿐이었다. 그녀는 그 감촉이 싫었다. 그건 세탁기에 넣으려던 세제가 실수로 손에 묻었을 때 느껴지는 거부반응과 비슷했다. 시멘트가루에 피해를 보는 건 지갑만이 아니어서 휴대폰이나 교통카드도 번번이 오작동을 일으켰다. 처음엔 비닐이나 랩으로 그것들을 잘 싸고 다니던 남편도 그래 봤자 별 차이도 없자 나중에는 그냥 다녔다.

그녀는 매일 전투하듯이 남편의 작업복을 비벼 빨았다. 하지만 아무리 빡빡 문질러 햇볕에 바짝 말려도 부연 시멘트자국은 없어지지 않았다. 빨래를 걷으며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는 그 흔적들을 볼 때마다 그녀는 괜히 마음이 참담해지곤 했는데, 남편의 지갑을 보고 있는 지금도 그와 비슷한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그건 남편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실망과 앞으로 과연 좋아지기는 할까 하는 비관 같은 것이 뒤섞인 우울한 마음상태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남편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좋게 보아 주려 해도 남편의 지갑은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길거리에 그냥 굴러 다녀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지갑을 되찾은 건 어쩌면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오히려 요즘 같은 세상에 주운 지갑을 직접 파출소까지 들고 가서 맡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기적 같았다. 아직도 이렇게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울적했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했다. ‘그래, 아직 세상은 살 만한 거야.’ 그녀는 지친 스스로에게 어떻게든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런 자신이 구차해 보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마음보다는 긍정의 마음이 낫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이 막노동을 시작한 뒤 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도 바로 그런 긍정의 힘이었다. 사람들은 일이 잘 안 풀리면 ‘까짓 노가다라도 뛰지 뭐,’ 하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실제로 자기한테 그런 상황이 오리라곤 믿지 않는다. 그만큼 누군가가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그의 사회적 지위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음을 의미한다. 그게 대부분 사람들의 고정관념이고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기에 초기에는 갈등도 많았다.

한 번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아이가 ‘가정환경조사서’ 라는 걸 들고 왔다. 부모의 직업란 앞에서 그녀가 오래 머뭇거리자 남편은 얼른 대충 써 버리라고 했다. 그녀는 ‘건축업’이라고 썼다. 그런데 직업란 옆 괄호 안에는 ‘구체적’으로 라는 요구사항이 있었다. 그녀는 대뜸 불쾌해졌다. 과연 아이의 부모가 건설회사 사장인지 잡부인지의 여부가, 교사가 꼭 알아야 할 사항인지 궁금했다. 그녀가 보기엔 그런 종이쪼가리 하나로 손쉽게 아이들을 규정하고 획일적으로 관리하겠다는, 학교의 구태의연한 의도 말고는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 혼자 속을 부글부글 끓여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 그녀는 괄호 안에 ‘조적’이라고 썼다.

또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유독 피곤한 얼굴로 집에 돌아온 남편은 늦은 저녁상을 받았고, 옆에선 큰아이가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었다. 밥을 먹다가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던 남편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해라,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면.”

“자기가 뭐 어때서?”

아이의 대답보다 그녀의 볼멘소리가 먼저 튀어 나왔다. 그녀는 거품이 잔뜩 묻은 고무장갑을 낀 채로 아이한테 뭐 하러 그런 소릴 하느냐, 당신이 떳떳해야 아이도 아버지를 무시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며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하지만 남편은 묵묵히 소주잔만 들이켰고 아이 또한 숙제에 정신이 팔려 부모의 얘기에는 관심도 없었다. 무안해진 그녀는 슬며시 돌아서서 하던 설거지를 계속했다.

그녀는 흐르는 물에 세제로 닦은 그릇들을 헹궜다. 그러다가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남편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아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가 남편한테 쏘아붙인 말은 구구절절 다 옳았지만, 정작 그녀의 본심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냥 넘기면 될 남편의 말 한 마디에 그토록 과민반응을 보였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날 그녀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남편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설거지를 천천히 해야 했다. 

남편은 이제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새카맣게 탄 얼굴과 팔다리에 오늘 하루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배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한 번 원 없이 진짜 잠만 자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비록 장마 때 몇날며칠 잠만 잤다 해도 일 걱정이 남편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이상 그건 참된 잠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순간만이라도 남편이 긴장이나 부담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태초의 평화 그대로와 같은 잠을 한 번 잘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날이 언제 올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내일은 예정된 일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이미 장마기간 동안 일을 못한 여파가 크긴 했지만, 그녀는 적어도 오늘밤만은 아무런 생각도 계산도 안 하기로 했다. 그것만이 요 며칠 땡볕 아래 고생한 남편에게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요 예의였다.

그때 문득 현관 구석에 팽개쳐 둔 남편의 가방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 돌아오면 그녀는 제일 먼저 가방 안의 작업복부터 꺼냈다. 그런데 오늘은 많이 늦었다. 역시나 가방을 열자마자 쉰내부터 훅 끼쳤다. 물에 빠졌다 벗어 놓은 것처럼 축축한 작업복은 연장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다. 그녀는 얼른 베란다 문을 열고 그것들을 빨래 통에 던져 넣었다. 그 다음으로 그녀가 하는 일은 젖은 솜처럼 욕실에 주저앉아 있는 남편의 샤워를 도와주는 건데 오늘은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그녀는 물수건을 하나 만들었다. 마디마디 굳은살뿐인 남편의 손은 땀으로 얼룩져 끈끈했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죽은 듯이 자고 있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지금 몇 시야, 몇 시? 응?”

남편이 자다 말고 깨어나 허둥대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장면이라고 해서 그녀의 속상한 마음까지 익숙해지진 않았다. 그녀는 입을 앙다문 채 남편의 손만 더 세게 벅벅 닦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