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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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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워리 비 해피


BY 헬레네 2009-02-14

19개월 짜리 어린딸과 환자인 남편을 데리고 추운 겨울을 살아낼일이 막막했다 .

임신 8개월의 만삭일때에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남편은 내게 식당이라도 하면 어떻겠냐며

나에게 은근히 기대고 싶어했고 남들은 이몸이라면 하던것도 걷어치울 판국에 아이하나

더먹여 살리는것이 그렇게 자신이 없어서 몇번씩 그런얘길 하냐며  화가나서 따지면서도   

그럴만한 돈은 있냐고 물으면  처가집에가서 장모님한테 빌리면되잖아 하며 빌려올곳까지

내게 안내했었다 . 그러던것이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고 보니 별수없이 그의 소원대로

밥집이라도 하게 생겼다 .

 

시어머니가 사시던 한옥집에 세째아들이 들어와 함께 살고있었는데 아들보다 여섯살을 더먹은

동서가 데리고 들어온 딸아이가 있어서 마뜩치 않은데다가 동서 역시 게으르고 못마땅한 구석이

많았던지라 자주 툴툴 대셨는데 우리의 사고이후에 손녀딸을 봐주러 온김에 아예 눌러 앉으셨다 .

 

열흘정도 혼자 고민을 하다가 남편과 시어머님을 앉혀놓고 앞으로 무슨일을하고 어떻게 살것인지

생각해본게 있냐고묻자 " 아니 " 한다 . 그럼 지금부터 생각을 좀 해보자고하자 시어머님이 버럭

역정을내신다 . " 한달이 됐냐 두달이 됐냐 이제 겨우 열흘이다 열흘 ,,,,,,,, " 하시자 " 그럼 그럼 "

하며 남편이 맞장구를친다 . " 당신 퇴원 한걸로 따지면 그런데 그 훨씬 이전부터 놀았었잖아 !

그리고 이제부턴 어떻게살지 연구를 해봐야지" 하며 한숨이 절로나왔다 .

 

병원비가 어찌 되었는지 한번도 물어보지조차 않으셨었다 .

맏이 노릇도 하느라고 했었고 네명의 동생들이 모두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건만 누구하나 병원비에

쓰라며 단돈 만원을 안 보탰었다 .  더구나 막내시동생 같은 경우에는 고등학교때에 후배를 때려서

구속되기 직전에 친정엄마가 해주신 남편의 열돈짜리 금목걸이와 나의 금목걸이 7돈을 팔아서

합의금을 대줘서 구속을 피했고 학교 졸업후엔 강릉의 국군병원에 직업군인으로 있으면서  지금의

동서와  춘천에서 매주만나 데이트를 하면서도 지척에있는 병원에 한번을 안와봤었다.

내가 지적하자 시어머니는 비상이란다며 오히려 역정을 내셨지만 " 군인이 언제는 비상 아닌가요

전시 상황이 아닌바에야 면회도 못오나요  " 라는 내말에   오히려 두둔을 하고나섰었다 .

아무리 노인네라지만 앞뒤는 가리셔야 하는데 늘 그게 잘안됐다 .

 

한참만에 입을 여신 시어머님이 이제 곧 겨울이올테니 전세금을빼서 보증금 삼백에 월 이십만원

짜리 월세로 나앉아서 쌀이나 한가마 사놓고 김장이나 한독을해서 파묻어놓고 먹으며 겨울을나란다 . 

한달에 오십만원씩만 생활비로 쓰면서 2년을 살다보면 그때쯤엔 에비가 나가서 벌어오겠지 하신다 .

어머니 다운 발상이다 . 어쩌면 저런 사고방식을 가지셨을까 한참을 쳐다보았다 .

 

2년후에 안정된 수입의 직장이 보장된것도 아니고 그렇게 다까먹고나면 언제다시 취업해서

언제다시 월세를 면하고 내집을 산단말인가 ? 8식구를 먹여살리시던 아버님도 많이 힘드셨으리라 .

동네 사람들이 과수원으로 남의집 밭으로 다들 나가셨을때에도 어머님은 집에 계셨다고 했다 .

그분들 만큼 자녀 교육을 못시킨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

 

가게를 보러 다녔다 . 한림대 근처의 닭갈비 골목안에 있는 닭갈비집을 남편과함께 보러갔다 .

보증금이 500에 월세가 52만원 시설및 권리금이 1500이었다 .

내가 둘러보면서 " 시설은 한 500이나 들었겠는데 많이 부풀렸네요 " 하자 펄쩍 뛰면서 아니란다 .

" 여기서 얼마나 했어요 ? " 하자 " 삼년이요 " 하길레 " 그럼 하루에 매상은 얼마나 되나요 ? "

했더니 " 한 이삽십이요 " 라며 대답 하는데 왠지 믿음이 안갔다 .

" 나는 큰 욕심은 없어요 그저 우리 애아빠 통원치료 하는동안 우리식구들 밥이나 먹고살면서

병원비나 안꾸러 다니면 감사하지요 돈이야 많이벌면 좋겠지만 그건 억지로 안되는 거잖아요 "

하며웃었다 . 집으로 돌아오며 엄마에게 천만원만 빌려주시라 얘기하고 계좌번호를 불러드렸다 .

 

다음날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어머님께 말씀드리고 언젠가 둘째네에게 해주시려 했었던

마을금고의 융자금을 저희에게 해주시면 좋겠다고 얘기하자 단박에 " 싫어 " 라고 대답하셨다 .

다시한번 여쭈었다 " 정말 싫으세요 " 묻자 " 그래 싫어 " 하셨다 . 배신감이 치밀며 두번다시

말을 섞고 싶지않았다 . 차마 친정 엄마에게 시어머니가 못해준다는 소리는 하지 못한채 다음날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 가게에 방이 둘씩이나 딸려 있으니 이집을 빼서 그돈을 이용하고 지출도

줄이자고 하면서 아직 시작을 안했으니 수입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월세에 이자에 또 집과

가게의 난방비와 공과금등을 감안하면 이집을 유지하기 위해선 최소한 한달에 40~50만원은

더 들것이니 그게 좋겠다며 얘기하자 이번에도 두모자가 강력히 반대한다 .

시어머니는 뇌수술한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시끄러운 가게방에 들어가면 머리가 아플

것이라 했고 남편은 엄마가 우리집이 편하다는데 왜 굳이 엄마를 불편하게 하냐는게 이유였다 .

참으로 철딱서니 없는 모자이다 . 그들은 내가 돈나와라 뚝딱 하는 도깨비 방망이라도 가지고

있는줄로 착각하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

이미 지고있는빛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면 지출을 줄이는게 급선무인데 그렇게 하자고

얘기하는 나를 마치 악착스럽고 돈만 따지는 못된년으로  몰아갔다 .

 

또다시 협상은 실패하고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

사정을 전해들은 친구는 길게 묻지도 않고 선뜻 천만원이란 거금을 부쳐 주었다 .

나라고 남들의 밥상머리 시중을 들고 싶어 안달이 났을까만 나를 허영심에 들떠서 일을 벌리는

젊은 치기로 몰아부치는 시어머니도 야속했고 자기 엄마와 정신세계 까지도 쏙 빼닮은 남편은

더더욱 버거웠다 .

 

95년 11월 25일 ,,,,,,,,, 흥부가 기가막혀란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달리고 있을때 배고픈 학생

들에게 푸짐하고 인심좋은 느낌을 주자는 발상으로 " 흥부네 닭갈비 " 란 간판을 걸고 오픈을 했다 .

          DON'T WORRY BE HAAP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