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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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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간집 며느리


BY 헬레네 2008-12-08

한다 , 안한다로 한달을 넘게 진을빼던 엄마가 이불에 가전제품에 혼수품을 사들이면서

신이난 얼굴로 " 내가 니 겔혼 시킬라꼬 삼백만원이 넘께 들었데이" 하길레 힐끗 쳐다보고

" 많이 해간다고 잘살겠어 택도없데이  그럴돈 있으믄 진작에 공부나 갈케줬으믄 공무원

이라도 한자리 해먹지 돈을 쓰라고 애원할땐 안쓰고 엉뚱한데 쓰느라 애쓰시네 " 라며

살차게 대꾸했다 . 니년은 이담에 니딸년을 얼마나 잘가르치나 두고 보자며 화를 내더니

니애비를  원망해야지 나한테 왜그러냐며 화를 삭히지 못해했다 .

부모는 똑같은 권리와 의무가 있는법인데 엄마는 항상 아버지만 의무가있고 엄마인

당신은 아무런 의무가 없다 . 지금까지도 " 내가 니들집구석에 와서 고생한거 생각하믄

이가 갈린다 ." 라며 얘기 할때면 내가 나서서 엄마는 참 이상하다고 50년을 넘게 살았으면

엄마집이지 아직도 니들집이라는 그 의식이 문제가 있다고 꼬집어 얘기해도 다음에

또 니들집구석이다 .

 

우리엄마만의 이상한 자식사랑 방법으로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나는 방아간집의

육남매 맏며느리가 됐다 . 고추빻고 떡쪄내고 볶아내고 갈아내는 방아간의 하루는 눈코

뜰새없이 바빴고 하루종일을 종종거리면서도 밥이며 빨래며 청소까지가 온전히 나만의

몫이었다 . 밤이면 홀시어머니의 잠자리 시중까지 들고 나서야 내방으로 돌아오면 물먹은

솜처럼 지쳐서 씻지도 못한채 잠들기 일쑤였다 . 여름엔 그나마 나았는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그 큰방아간 안은 썰렁하고 추워서  따끈한 아랫목에 들어가면 절로 잠이 쏟아졌다 .

 

그러는 와중에도 나보다 7살이나 더먹은 신랑은 밤마다 나를 안고싶어했고 나는 문학전집에

나오는 순이처럼 도망을 가던가 확 불을질러 버리고 싶었다 . 잠이라도 편히자게 깨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 금새 풀죽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 나를 중매한 큰형부는 태백에서

알아주는 깡패였다 . 하나밖에 없는 동네 약방에 가서도 약을 내놓으라며 협박해서 뺏어오기

일쑤였고 광산에  출근해서도 일하기 싫으면 출근한것처럼 해놓곤 그냥와서 마른공수를 먹었

다며 자랑스레 떠벌리고 다니며 밉상을 부리더니  함백에 있는 광산으로 쫒겨 갔는데 그곳에서

사귄사람을 언니와 둘이 내게 중매를 한것이다 .

 

문제는 큰언니였다 . 그와중에도 툭하면 내게와서 아이들을 맡겨두고 갔는데 시어머니는

방아간이 바쁜줄 뻔히알면서 니네 언니는 왜 툭하면 애들을 맡겨두고 가냐며 나를 닥달했다 .

일찍 혼자가 되서 고생을 많이 했었다며 내가 젊어서는 어땠는데 이까짖걸 고생이라 하냐며

내가 젊어서는.....을 달고 살았다 . 담배를 하루에 두갑씩 피워대는 호랑이 상을한 시어머니가

우리엄마 만큼이나 무서웠다 . 식구도 늘었는데 방아간에서 나오는 떡부스러기 구정물과

동네에서 나오는 음식구정물을 걷어다가 돼지를 길러야 한다면서 찬바람이 부는 어느날

돼지우리를 지었고 나는 동네를 돌면서 돼지 구정물까지 걷으러 다녀야 했다 .

 

임신을 했다 . 사과를 좋아하는 시어머니를 위해 효자인 맏아들은 며칠에 한번씩 부사를

사다가 어머니 방에 갖다 드렸고 나는 그것이 너무나 먹고 싶었다 .

나한테도 한번쯤은 먹어보라고 할수도 있으련만 절대로 그러질 않았다 .

내가 먹고 싶었다고 얘길 했더니 딱한번 부사 다섯개를 어머니 몰래 들고와서 장롱안에 감춰주며

들키지 않게 먹으라고 얘기해 주었다. 밤에 내방에 들어가 2개를 먹고 3개를 장롱안에 다시 감추어

두고 이틑날 돼지구정물을 가지러 나갔다 왔더니   난리가 났다 . 몰래 사과를 사다가 쳐먹고

장롱안에 감춰둔걸보니 한두번이 아닌것 같다며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 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 그러시는 분은 왜 내방의 장롱까지 뒤짐질을 하셨단 말인가 ? 효자인 그아들은

날위한 말한마디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듣고만 있었다 . 언젠가 한번 내입장을 변명하다가 그엄마와

이웃에 살던 두명의 이모들 까지 합세해서  혼자몸으로 뼈빠지게 키워놨더니 병신처럼 여편네

역성이나 든다며 호되게 당한적이 있어던 지라 어찌할줄 모른채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

 

어느날 배가 아프고 숨이차며 오한이 엄습했다 . 입술까지 노래진 나를 보더니 택시를 대절했고  

병원으로 갔더니 의사가 나를 쳐다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어떻게 임신 7개월이 되도록

한번도 병원을 안와봤냐며 놀라워했다 . 첩첩산골에 사는것도 아니고 요즘도 이런사람들이

있다는게 믿기지가 않는단다 . 산모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애기가 삼개월 크기만큼밖에 발육이

안되었고 그나마 뱃속에서 사망한지 오래됐는데 시간이 경과하면서 뱃속에서 딱딱하게 굳어서

하루 , 이틀만 늦었어도  산모까지 사망할뻔 했다며 진작 병원에 와서 적절히 치료했어야 하는데

너무 늦었다며  큰병원으로 가서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산모도 위태롭다 했다 .

 

황지에 있는 큰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니 미운털이 제대로 박혀버렸다 .

시어머니의 여동생이 저사람 배가 너무 작고 5개월이 되면 뱃속에서 놀아야 하는데 이상하다고

병원에 한번 가봐야 하는것 아니냐고 얘기 했다가 시어머니에게 혼만났었다 .

옛날엔 멘스가 끊어지면 아를 가졌나부다 하고 열달만에 때가 되면 다 나오게 되어있는데

무슨놈의 병원은 병원이냐며 소리를 버럭 지르기에 두번다시 병원 얘긴 꺼내 보지도 못했었는데

결국 다 죽게 생겨서야 병원을 갔던 것이다 .

 

당신이 나를 그렇게 혹독하게 부려 먹었으면서도 잘못을 뉘우치긴 커녕 혀를 끌끌차며 " 나는

새밭을 메어서 개간을하고 막달까지 밭을 메다가 밭고랑에서도 아를 낳았는데 니는 어째 그래

 부실하나" 하며 쯧쯧 거리며 " 아도 하나 쑥 못뽑아 내는 주제에 " 라며 대놓고 미워했다 .

 

방범대원으로 근무하던 시동생의 근무복을 다리다 깜빡 잘못해서 눌러 붙었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 어떡하지 또 한바탕 난리가 나게생겼다 .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고

울고 있는데 나를 중매한 큰형부가 들어서다가 나를보곤 왜 울고있냐며 다그치기에 " 옷을

태워서요 " 했더니 씨팔 사람을 얼마나 닥달을 했으면 그깢걸 갖고 이렇게 서럽게 우냐며 처제가

말안해도 나도 알만큼은 안다며 내가 몇사람들 한테 전해들은 얘기가 있었다며 하루종일 일년

365일을 개처럼 부려 먹으면서 니들이 사람이냐고 길길이 날뛰었다 .

 

이틑날 한시간 이십분의 기차거리를 엄마가 달려왔고 뼈만남은 내 몰골에 눈물을 흘렸다 .

시어머니와 엄마와 형부와 시동생 네사람의 격한 대립으로 막말과 고성이 오갔고 남편의 만류로

겨우 엄마와 형부는 돌아갔지만 전쟁은 그때 부터 시작이었다 .

사사건건 트집을 잡혔고 엄마의 두달만이 1년 2개월만에 서서히 종방으로 치닫고 있었다 .

더이상은 내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

 

어느날 시어머니가 제천의 큰딸네 집에 가면서 이틀간 집을 비웠고 이틀간의 방아삮을 손에 쥐고

입은채로 그집을 나와 신작로를 따라 뻗어있는 길을걸었다 . 처음만난 버스에 무작정 올라탔고

얼마를 달리다가 버스기사에게 어디를 가는 차냐고 물었더니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영월로가는 버스라며 어디가는 건지도 모르고 무작정 탔냐고 물었다 .

 

얼마를 달리다가 산위를 쳐다보니까 아늑한 절이 보였다 .

내려달라고 부탁을하고 버스에서 내리면서  산길로 올라가 무작정 그절을 찿아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