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을 했다 .
더이상은 견딜수가 없었다 .
도시락을 못가져 간날은 점심시간이면 아이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학교동산에
들어가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숨어있어야 했고 공납금을 독촉하는 선생님의 따가운
눈총도 죽기보다 싫었다 .
처음 입학해서는 국민학교에서 성적도 우수했고 웅변대회에서 1등한 아이라며 관심을가지던
선생님들도 공납금이 밀리고 준비물이 필요한 미술이나 만들기등의 수업시간엔 으례 빈손인
내게 힐끗 쳐다보시곤 혀를 끌끌차며 " 누구 남는사람 쟤좀줘라 " 하신다 .
한창 예민한 시기에 자존심이 상했고 때마침 내가 벌면서 낮엔일하고 밤엔 공부할수있는
기숙학교가 있다는 말에 무작정 그아이를 따라 나섰다 .
둘째 언니는 내가 얘기하자 그게 좋겠다며 선선히 승낙하더니 차비를 마련해 주었다 .
세상물정모르는 16살 여중생의 비장한 자립이었다 .
부산에 도착해서 택시를타고 도착한곳은 바다바람이 눅눅하게 코끝을 스치는 봉제공장 이었다 .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한방에 대여섯명씩 있었고 각자의 사물함이 하나씩 배정되었다 .
새벽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기상나팔 소리가 울렸고 각자 덮고자던 모포를들고 5분이내로
마당에 집합해 털어 개켜내지 않으면 벼락이 떨어졌다 .
선진반 , 중진반 , 신진반이란 급수로 갈렸는데 나이가 아니라 들어와서 교육받은 순이었다 .
나는 신진반이라 중진반 , 선진반들을 보면 무조건 인사를 해야했다 .
국민체조를 하고 6시부터는 각자의 정해진 청소구역을 맡아서 청소를 하던가 토끼풀을 뜯던가
해야하는데 청소도 먼지한점없이 해내지 않으면 무섭도록 혼이났다 .
7시30분 아침을 먹으면 똑같은 까운과 스카프를 쓰고 작업장으로 가서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공업용 미싱을 돌려야했다 .
어쩌다 몸이아파서 얘길해도 들어주질 않는다 . 야간작업 이라면서 저녁식사후 3시간을 더부려
먹는날도 허다했다 .그야말로 노동력을 쥐어 짜내면서 부려먹었다 .
어떤아이는 못견디고 야반도주를 하다가 담벼락에 걸려서 들켰는데 붙잡아다가 때려서 맞아
죽었다더라는등의 흉흉한 얘기가 돌았고 아이들은 군기가 바짝들어서 누구하나 거부하지 않았다 .
봉제학교에선 군인들의 소품들도 만들어 냈는데 자기들 말로는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 대통령
께서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세우신 학교라고 선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거짓이었던것 같다 .
미싱을 밟아 돌리는 단순한 작업이 6개월씩이나 교육을 받아야 할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기술도
아니거니와 그육개월 동안 혹사당한 인건비는 졸업할땐 겨우 돌아갈 차비정도였다 .
우리모두는 불과 보름이면 일류미싱사에 견줄 정도였는데 대통령 께서 세우신 학교란 미명하에
우리들 고사리손의 노동력을 착취했을 것이란 생각이 지금도 떠나지 않는다 .
내가 가장분개한것은 낮엔 일하고 밤엔 공부하리라던 포부가 사라져 버린것이다 .
학교는 아예 있지도않았고 10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려서 지칠대로 지쳐 있었기에 여건이
된다해도 할수가 없었다 .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천리먼길을 찿아가 뼈가 빠지도록 고생을하고 서울의 모 봉제 공장으로
찿아가 취업하라는 통지서와 함께 알량한 인건비를 받아쥐고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