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얻어살던 보령을 떠나 태백으로 귀향했다 .
두집건너에 살던 원자 , 이름처럼 순했던 순분이 , 기름집딸 종미 등등
그리운 이름들이 생각났다 .
엄마가 얻어 살던집은 하장성에 있는 출렁다리 입구에 있었다 .
내가 떠나기전에 살던집은 야트막한 산밑에 마당이 있는 아담한 집이었는다 .
뒷산으로 올라가면 교회가 있고 가발공장이 있었다 .
바로 옆집은 읍장님네 집이었는데 그집에 내또래의 딸이 있었는데 나하곤 비교도 되지않는 공주였다 .
병풍처럼 둘러쳐진 야산아래 아담하게 자리했던 그집은 엄마와 아버지 우리 오남매가 함께
가족이라는 구성원으로 살던 마지막 집이 되었다 .
엄마의 옹색한 단칸방에서 보름정도 지내다가 떠나기 전에 다니던 삼성국민학교를 찿아가
그동안의 경위를 이야기하고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하자 선생님 한분이 말씀하시길 작년에
학교에 불이나서 서류가 모두 불에 탄탓에 네가 이학교를 다녔다는것을 입증할수가 없다 .
더구나 넌 4학년 2학기를 안배웠고 5학년도 절반도 채 다니지 않았으니 정 다니려거든 6학년은
안되고 5학년 부터 다시 다니라고 하신다 .
그렇다면 나하고 같이 다니던 아이들 보다 한학년 아래인 동생이 되는것인데 ,,,,,,,,,,,,,,,,,,
자존심이 상하고 눈물이났다 . 그렇지만 선생님 말씀이 일리가있고 맞는말씀 이셨다 .
1학년 3반으로 입학해서 바뀌지 않고 그대로 올라간 3반이 었기에 그애들의 눈에 뛸까 두려워서
피해 다녔다 . " 얘들아 내가왔다 " 말하고 싶었는데 ,,,,,,,,,,,,, 워낙 조용하고 말이없던 아이였고
2년간의 공백이 있었던지라 일부러 피해다니는 나를 알아보는 아이들은 없었다 .
그렇게 두달인가를 다녔고 72년 여름 보령에서만큼 큰 수해가 휩쓸고 지나갔다 .
하천가 출렁다리옆에 있던 엄마의 단칸방도 떠내려갔다 .
석공에서 선탄부로 근무하던 엄마는 금천에있는 사택을 배정받아 이사를 해야했고 학교도
당연히 금천국민학교로 옮겨야했다 .
삼성국민학교에서도 적이 없었으니 또 전학증이 없는 아이였다.
그무렵 보령에서는 폐광이 시작되면서 아버지와, 언니 , 막내까지 모두 돌아와 사택 단칸방에
합쳐졌고 떨어져살던 그것도 이혼한 전남편을 엄마는 못견뎌했고 밤이면 싸움이 끊이질 않더니
어느날 엄마가 짐을챙겨서 나가버렸다 .
원래 선탄부는 광산에서 순직한 사람의 배우자 이거나 국가유공자의 가족만 취업할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한문에 능하고 워낙 명필이시라 광업소 정문에 써붙이는 공고문이나 필요한 서류들을
대필을 하러 많이 불려다니시며 광업소의 높으신 분들과 교류하시면서 말하자면 빽으로 엄마를
취업시키셨다 .
그것을 빌미로 술값이 궁할때면 내입만 뻥끗하면 모가지라고 윽박을 지르며 몇번을 우려 먹었다 .
금천 국민학교에서 5학년이 끝나고 6학년이 되었다 .
삼성국민학교서 최초 4학년 까지는 공납금을 못내서 툭하면 집으로 쫒겨와야 했다 .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지적을받고 오시는날은 공부시간에도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악질적인
미납학생들을 선발해서 엄마한테가서 공납금 받아오라며 돌려보냈다 .
당연히 나는 단골손님 이었다 . 내 기억으론 공납금을 못낼정도는 아니었다 .
곗돈을타서 숨겼다가 아버지에게 들켜서 싸우기도 했었고 , 아버지가 광업소에 근무 하시며
타오는 월급으로 공납금을 낼수는 있었지만 우리엄마는 안주고 버틸때까지 버티다가 졸업하면
그만이라는 무식한 똥뱃장쪽이 었던것 같다 .
큰언니는 선생님이 공납금 갖고와라 하면 집에오자마자 엄마를 달달 볶는다 .
그래서 반애들 중에 지가 젤먼저 갖다냈다고 늘 자랑하는데 둘째언니하고 나하고는 엄마에게
달라고 했다가도 엄마가 " 담에줄께 " 하면 두번다시 얘기도 하지못했다 .
집으로 쫒겨와서도 " 선생님한테 엄마가 곗돈타서 준다그래 " 하면 " 네 " 하고 학교로 돌아가
선생님께 그대로 말씀 드리면 선생님은 혀를 끌끌차시며 " 앉아 " 하신다 .
한번도 곗돈을 타서 갚아준적이 없음은 물룬이다 .
동사무소에서 받으러 오던 주민세도 끝까지 버티다가 동사무소 직원들이 포기했다 .
그랬는데,,,,,, 전학증이없는 청강생이 되고 부턴 개화국민학교 에서도 삼성국민학교 에서도
금천국민학교 에서도 나더러 공납금을 안냈다며 돌려보내질 않는다 .
또 6학년이 되고 한개반인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점수가 잘나왔다 .
여자 1등이던 임숙희를 내가 눌렀단다 .
그아이가 내가 컨닝을 했다고 거짓 고자질을해서 날 곤경에 빠트렸고 나는 선생님께 불려가
시험을 다시보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 그아이의 아버지는 막강권력인 부항장 이었다 .
금천에서 젤먼저 T.V 를 산집이었고 금천에서 젤 잘사는 집이었다 .
첨엔 힘들었는데 나중엔 친해져서 정답게 지냈다 . 지금도 이쁘장한 그애의 모습이 생각난다 .
학교에서 6.25 사변을 기념하는 웅변대회가 열렸다 .
내가 쓴 원고가 채택이되고 나는 연사가 되었다 .웅변은 사실 자신이 없었지만 열심히 연습했다 .
심사 결과 내가 1등을 했다 . 교장 선생님은 원고는 좋았지만 내 목소리는 웅변에 적합치가않은
고음이다 하지만 1등을 준다 장하다 뭐 대충 그런 말씀이셨다 .
겨울 방학이 오고 드디어 졸업이다 .
금천국민학교는 생긴지가 얼마 되지않아 우리가 첫회 졸업생이었다 .
엄마와의 이혼후 아버지의 술과도박으로 생활은 더 궁핍해져서 중학교에 진학할사람 손들라시며
선생님이 인원 파악을 하시는데 손을 못들었다 .
학교가 생긴지 얼마안됐고 아이들수가 적은 관계로 졸업앨범 대신 단체사진 한장으로 대신한다고
점심시간에 각자 자기의 의자를들고 교실 밖으로 나오라고 얘기하시던 선생님 께서 나와 또한명의
남자아이를 손가락으로 지목하시며 " 너희둘은 나올 필요없다 니들은 전학증도 없는 애들이고 학교에
서류가 없어서 졸업장도 없으니 사진도찍지 마라 " 하신다 .
걸상을 들고 일어서던 손에 힘이 빠지면서 서럽고 분했다 .
그럼 웅변대회는 왜 내보냈으며 상장은 왜 ?줬단 말인가 ?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려있는것이
창피하고 억울했다 .
전학증이없다고 사진 조차 못찍게하는 선생에게 존경심은 사라지고 고통스런 원망과 분노가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