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때면 아이들은 늘 배가고팠다 .
허기를 참아가며 이십여리를 걸어오면서 터특한것은 자연의 먹거리를 취하는 것이었다 .
봄이면 산딸기를 따먹고 여름서 부터는 온갖 산열매나 과일 서리를 가을이면 머루 다래
산밤 등을 따먹다가 늦가을엔 김장무우를 훔쳐 먹었다 .
앞에 가는 아이가 발로 툭차서 쓰러뜨려 놓으면 뒤의 아이가 줏어와서 까먹었다 .
그렇게 유기농 자연간식을 먹으면서 겨울이 왔다 .
남들은 지붕에 닿을정도로 해놓은 장작이 우리집엔 없었다 .
어느추운 겨울날 언니와 나는 입성도 부실한 얇은 나이롱 티에 무릎이 다헤진 빨강내복
하나씩만 받쳐입고 장갑도 없이 양말도 신지 못한체 4살배기 막내를 끌어안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무릎까지 올라오는 눈에 묻혀 눈보라에 덜덜 떨면서 춥다고 우는 막내를
안고 산을 내려 오던 생각은 지금도 생생하다 .
그렇게 지독하게 추웠지만 기어이 봄은 오고야 말았다 .
냇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하고 집앞의 도랑물도 흘러내렸다 .
엽집에 사는 무당할머니는 장애를 앓는 대여섯살 정도의 손녀를 돌보고 있었는데 혼자서는
앉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아이였다 .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늘 교대로 안고 있었는데 밥도 비스듬히 눕혀놓고 떠먹였다 .
할머니는 엄마없이사는 우리가 만만했는지 내가 학교만 갔다오면 불러다가 요강을 비워와라
걸레를 빨아와라 방을 닦아라 나무를 해와라 하며 허드렛일을 시켰다 .
나보다 두살 어린 자기 늦둥이 딸도 있었지만 그아이는 앉혀놓고 늘 나만 불러다 시켰다 .
싫다소리 한번을 못하고 바보처럼 그일을 하면서도 그러는 내가 죽기보다 싫었다 .
나보다 덩치가 큰 그집딸은 마치 노비문서를 쥐고 흔드는 양반집 딸마냥 거만한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
어느날 반년여 만에 나타난 엄마가 그꼴을 보더니 난리가 났다 .
지딸은 금쪽같고 남의 새끼는 손등이 터져서 갈라 지도록 부려 먹었냐며 화를 내더니
" 이 빙신같은 가시나야 주데이는 뒀다 모할껀데 왜 싫다는 소리한번 안하고 시키는 데로
다하고 자빠졌드나 ? " 하며 소리소리 질렀다 .
나도 싫었다 .
싫은걸 싫다고 말할수 조차 없게 만든 사람들이 바로 엄마 아버지 당신들 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
수해로 집이 떠내려 가고 집을 다시 짓도록 땅뙈기를 제공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고 그들은
확실한 나의 노비문서를 쥐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거역할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