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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의 뇌진탕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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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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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BY 헬레네 2008-10-01

여름방학이 오고 ,,,태백에선 얕은 앞개울에서 손바닥을 바닥에 대고 발장구를 치며 멱을 감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보령의 앞개울은 강물 수준이었고 그곳에 들어가면 내키를 훌쩍넘는깊은

곳이 많았다 . 바닥엔 달팽이가 쫘악 깔려 있었고 헤엄을 치다보면 뱀장어같은 물고기들이

내몸을 스치며 지나가 나를 화들짝 놀래켰다  . 봄이면 뒷산엔 산딸기가 지천이었고 ,,,,,,,,

 태백에선 일렬로 지어진 사택들이 1호방에서 8호방 내지 10호방까지 붙어있어 한집에

대여섯명 한골목에 몇십명의 아이들이 바글대고 있었지만 늘 갈곳이 없었다 .

 

보이는것은 산과 하늘과 높이 쌓여진 석탄더미와 하천을 따라 일렬로 지어진 사택들이

시커먼 탄가루를 뒤집어쓴채 살풍경한 모습을 하고 있는것에 비해 보령은 논밭들이

평평히 펼쳐진 정감있는 시골풍경이 엄마와 형제가 헤여져 살고있는 정신적인 허기를

 면하게 해주었다 .

 

방학이 시작된 며칠후 이틀을 내리 퍼붓던비에 500m 정도 떨어져 있던 앞개울물이

순식간에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한방줌에 대피령이 떨어졌다 .

마을 이장님과 구장님 그리고 몇몇 어른들은 북과 꾕과리를 치며 집집마다 피신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다녔다 . 새벽 1~2 시 사이쯤이라 잠자는 막내 여동생은 내가 들쳐업고

아버지는 쌀가마를 언니는 밥그릇과 옷가지 몇개를 챙겨 황급히 빠져 나오는데 방문을

열자 벌써 문지방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

 내키로 허리춤까지 차오른물로 동네는 이미 아수라장이었고 신작로위 언덕에 붙어있던

이발소집은 많은 사람들이 피신을 와있었다 .

다음날 날이밝고 신작로에서 내려다본 동네는 완전히 물에잠겨 간신히 지붕만 보이고 있었다 .

 

 

비가 그치고 물이 빠졌지만 동네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아버지와 언니를 따라 살던집으로 가보니 흙벽집은 간신히 형체만 남아있고 부엌이있던곳을

삽으로 파자 숟가락과 밥그릇 몇개가 흙속에서 빠져 나왔다 .

방바닥인것 같았던 곳은 젖은 진흙사이에 떠내려 가다 걸린 옷가지 몇개가 모습을

드러냈고 언니는 울면서 그것들을 챙겨 돌아왔는데 동네어귀에 있던 다리까지 끊어진터라 

모든 생필품은 공급이 중단된 상태이지라 비누가 없어서 빨수도 없었다 .

 

며칠후 요란한 헬리콥터 소리가 나더니 보따리를 떨어뜨렸는데 라면과 헌옷가지 비누등이었다 .

복구가 시작되고 우리는 정부지원금과 아버지 동료분들의 도움으로 흙벽돌을 찍어가며

집을짓기 시작했다 . 홍수가 쓸고간 보름후쯤 엄마가 찿아왔고 워낙 약골이었던 나는 왠지

나른하고 어지러운것이 힘이없었다 .몇달만에 찿아온 엄마가 아버지에게 애가 이상하니

병원에 데리고 가보라고 부추겨서 아버지를 따라 병원에 갔고 먹은게 체했다며 간호원이

주사 두대를 놔줬다 .주사맞은곳을 문지르고 바지를 추켜입는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나를

아버지는 오히려 애가몸이 약해 그런다며 의사에게 죄송하다며 백배 사죄하고 나를업고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그길로 두달을 넘게 자리에 누워 앓았다 .

장마가 끝나고 시작된 전염병이 마을을 휩쓸었고 허약했던 나는  석달만에야 전염병을 털고

일어날수 있었다 . 일어나 보니 동네에 오래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안계셨다 .

워낙 약골이라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 훈시 도중 몇번 쓰러져 선생님들을 긴장 시켰던 나는

그렇게 털고 일어난 10월에 다시 학교에 갔고 얼마후 학교  신체 검사에선 몸무게 23.5 kg 의

왜소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