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여자의 목걸이
서랍 안에 여자의 금목걸이가 있었다.
그리고 일기장이 있었다.
황 여사는 흥분하여 떨리는 손으로 겨우 목걸이를 들어 보았다.
처음 보는 목걸이였다. 목걸이를 요리조리 살펴보던 황 여사는 주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걸 보았다.
갑자기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 대는 걸 진정하려 애쓰며 일기장을 넘겨보았다. 유비가 써 놓은 글에서 주연의 이름이 보였다.
더워서 창문을 열어두고 공부하다 잠이 들었는지 누워 잠들어 있는 주연을 보고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주연의 방에 침입을 했다.
방문이 열려 있어서 쉽게 들어갔다.
주연이는 무슨 약을 먹었는지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옷을 벗겨도 깨지 않았다. 그래서 순간 몹쓸 죄를 짓고 말았다.
그리고 도둑이 든 것처럼 하기 위해 목걸이를 가져왔다.
평생에 씻지 못 할 죄를 지었다. 죽고 싶다.
이러한 내용이었다. 황 여사는 털썩 방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믿고 싶지 않았던 일을 아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에 앞이 캄캄하여왔다.
병원에서 보았던 주연이 생각났다. 임신 5개월. 바로 자신의 아들 유비가 저지른 일이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황 여사는 유비가 죄책감으로 집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라도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하숙집에서는 진즉 방을 옮겼기 때문에 병원에서 주소를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의 미스 신에게 물었다. 접수대장을 살펴보던 미스 신이 주소를 알려 주었다. 황 여사는 주소를 적어서 직접 찾아 가 보았다. 그런데 주연이는 그 곳에 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주연의 친구가 동생과 살고 있었다.
주연을 만난 지 오래되어 전혀 소식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었다. 주소까지 사실대로 적어놓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자신의 고통이었으리라.
황 여사는 주연을 꼭 찾아내야겠다던 마음을 바꾸었다. 차라리 이쯤에서 모르는 일로 덮어 두는 게 주연이를 위해서도 유비를 위해서도 나은 일이라 생각 되었다.
그래서 유비가 어서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주연이가 애처롭고 안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모든 죗값은 자신이 받겠다고 마음먹었다. 영원히 묻어 두어야 할 비밀을 지닌 채 황 여사는 매일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몸도 마음도 춥고 쓸쓸하게 했던 겨울을 어찌어찌 보내고 따뜻한 햇살을 찾아 창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담장을 지키는 매화나무에 하얀 꽃이 피어서 봄날임을 알려왔다.
하루가 다르게 개나리며 진달래가 서로 다투듯 꽃잎을 펼쳐대었다. 황 여사는 아직 피지 않은 철쭉꽃을 기다려야 했다.
일하는 병원의 정원 귀퉁이에 3년 전 심어 놓은 철쭉이 정말 아름답게 꽃을 피운다. 올 해도 어김없이 화려하게 꽃이 피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매일 지나치며 들여다보았었다. 어서 환하게 피어보아라. 하면서.
드디어 하나 둘 꽃잎이 보이고 며칠 사이로 화려하게 봄을 뿜어내는 철쭉을 감상하고 집에 왔던 날 유비가 돌아왔다.
정말 철쭉이 활짝 피어나니 황 여사에게 최고의 기쁨이 온 것이다.
그래서 유비가 집에 돌아 온 기념으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려 했는데 운명은 다시 시작 된 것이었다. 비밀은 봄눈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했다. 저지른 죄는 살면서 업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했다.
아들이 뿌린 씨앗이니 마땅히 거두어야 했다.
순리대로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걸 자각하고 황 여사는 서둘렀다.
주연이 아이를 데리고 사라지기 전에 만나야 했다.
결국 주연이를 만나지 못했다.
용서도 빌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주연이 아이를 두고 떠나 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유비가 더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황 여사는 이렇게 해서 너의 아이라는 걸 알았고 그래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을 마쳤다.
유비는 무릎을 꿇은 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끝까지 듣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엄마가 모든 사실을 알아버렸다니 변명 할 여지가 없었다. 그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황 여사는 그러한 아들과 갓 태어나 어미에게서 버림받은 아기를 번갈아 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제는 우리가 거두어야겠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받아들여야겠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죽을 때까지 그 사건이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니 대책을 세우자.
아이는 너의 양자로 길러야겠다. 훗날 결혼 할 때에도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생각해 봤는데 아이를 친척이라고 여기는 게 나을 것 같다.
주위에는 부모를 사고로 잃어 오갈 데 없어서 양자로 들여 기르는 걸로 해야겠다. 아직 네 나이 스물여섯이니 네 인생 이제 시작이다 생각해라. 엄마를 믿어라. 엄마가 너를 위해 모든 걸 떠안고 살겠다. 하고 일단 충격으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 유비를 안심시켰다.
황 여사는 침착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피 할 수가 없었다.
그리 믿었던 아들이 저지른 실수로 세상이 무서워져 겁이 났다.
그렇다고 아들이 일생을 숨어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용기와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할 궁리를 해야 했다. 그래서 고민한 결과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게 최선이라 생각한 것이다.
유비는 자신의 실수가 엄청난 결과를 낳게 하여 도저히 용서조차 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벌써 대책을 세우고 희망을 주고 있어 용기가 생겼다. 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이제 아이를 위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유비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적응해야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아빠가 되었고 책임을 져야했다.
아이 낳으러 가던 주연의 모습이 떠올라 괴롭기도 했다.
혼자서 창문 틈으로 주연의 하숙방을 훔쳐보며 짝사랑을 했던 자신의 지난날이 그리웠다. 그 때는 이렇게 엄청난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주연의 인생을 망쳤다. 그리고 되돌아 온 화살을 맞고 일생을 힘들게 살아야 한다니 유비는 비참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느끼고 계실 고통에 비할 바가 안 되어 한 없이 자책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황 여사는 유비가 복학하기를 원했다.
지난 일은 다 잊고 새로운 각오로 공부에 전념하라 했다.
그래서 유비는 한 때의 잘못으로 자포자기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황 여사도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직접 기르기 위해 일을 그만 두었다.
이제 유비의 아들이며 자신의 손자가 된 아이에게 최선을 다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이 있어 아이를 마음 놓고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유성이가 기어 다니다가 걷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몹시 크게 앓던 날 유성이를 업고 병원에 가던 중이었다.
꽃 샘 바람을 피해 고개를 돌리던 황 여사가 주연을 보았다. 지나가는 버스 안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주연은 황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