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유비의 자식
황 여사가 집에 있는 유비에게 전화를 하였다. 집에 돌아 온 기념으로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하자고 나오라 한 것이었다.
유비는 약속 시간보다 더 훨씬 빠르게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어머니가 일하는 산부인과 앞 꽃밭을 구경하려는 마음이었다. 그 꽃밭에는 3년 전 황 여사가 심어 놓은 철쭉나무가 있다. 그 철쭉꽃이 지금은 많이 자라서 한참 화려한 꽃을 피었을 거라는 생각에 얼른 보고 싶어 걸음을 재촉 하였다.
유비가 버스에서 내려 산부인과 앞까지 거의 다 왔는데 바로 앞에서 택시가 한 대 급히 정차를 하였다. 그리고 택시에서 어느 여자가 몸이 무거운 듯 천천히 내렸다. 누구나 한 눈에 곧 분만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가 몹시 부른 모습이었다.
유비는 슬쩍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눈을 의심하여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았다. 주연이었다. 분명 이웃에 살던 그 여학생 주연이었다. 유비는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주연이 큰 배를 숨기듯 긴 바바리 옷깃으로 배를 가렸다. 그리고 진통이 심해오는지 허리를 잔뜩 구부렸다. 그러면서 산부인과 문을 밀고 들어가는 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가슴이 심하게 뛰는 걸 의식하며 유비는 고개를 숙였다. 힘이 빠진 다리를 끌어서 꽃밭을 장식한 넓적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뭔가 떨쳐 내 버려야 할 기억을 지우듯이 그렇게 멍하게 앉아 있었다. 철쭉은 유비의 마음을 아는 듯 조용히 화려한 꽃잎도 흔들지 않았다.
황 여사는 아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짐작에 마음이 급하여 서둘러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뒷문으로 나오려다가 카운터의 미스 신에게 전 할 말이 있어서 진료실 쪽으로 걸어갔다. 5미터쯤 앞에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분만실로 향해 걸어오는 젊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산모가 들어왔구나 하는 생각으로 슬쩍 얼굴을 보던 황 여사는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옆집에 살던 주연이라는 걸 알아 본 황 여사는 당황하여 ‘어?’ 하고 외마디를 뱉고 말았다. 주연은 진통으로 정신없어 주위를 의식하지 못했다.
분만실로 들어가는 주연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황 여사는 침착해지려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냥 모르는 척 해 버릴까 하다 그럴 수 없다는 양심에 자꾸만 분만실이 마음에 걸렸다.
황 여사는 일단 발걸음을 떼어 유비에게로 갔다.
어쩐지 기운 빠져 보이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황 여사의 번뇌는 시작되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자신과 아들에게 막대한 짐이 될지언정 외면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사하게 저녁을 먹자했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 랄 것 없이 대충먹자로 의견이 일치되었다. 먼저 황 여사의 눈에 띄는 곰탕집으로 걸음을 향했다.
유비와 황 여사는 서로 눈치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 온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유비는 엄마에게 뭔가 말할 듯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황 여사도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 결국은 외면하고 말았다. 유비가 먼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들의 뒷모습을 보던 황 여사도 안방으로 들어가 밤늦게까지 불을 끄지 못했다.
유비는 다 잡았던 마음에 다시 혼탁한 두려움이 되 살아남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흩뿌려진 깜깜한 어둠도 못난 자신을 다 가려주지 않음을 탓하며 밤새 고통스러워 울었다.
다음 날 황 여사는 유비의 아침상을 차려 놓고 서둘러 출근을 하였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주연이 아이를 낳았는지 알아보려고 미스 신을 찾아갔다.
간호사 미스 신은 평소에 황 여사와 아주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황 여사에게 미주알고주알 숨김없이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은 다 얘기해 주었었다.
그러한 미스 신을 황 여사는 좋아 했었다.
미스 신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밤 12시 10분 전에 주연이 아들을 낳았다. 그랬는데 아침에 보니 주연이 없어졌더라. 그래서 황 여사가 다그쳐 물었다.
"어디 갔는데?"
"몰라요. 편지 써 놓고 사라졌어요."
"아기는?"
“뭐 쉽게 말해서 버린다고 하면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황 여사는 등줄기에서 뜨거운 열이 솟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고 황급히 원장에게 달려갔다.
원장은 대책을 세우느라 간호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 여사는 원장에게 주연이 자신의 친정 쪽 친척이라고 하며 주연이가 남긴 편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원장은 오랜 세월동안 주방을 맡아 일해 온 황 여사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어머니 대하듯 다정다감했고 잡다한 속 얘기까지 나눌 정도로 인품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편지글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아기의 친부는 세상에 없고 자신 또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 그러므로 병원에서 아이를 어디로든 보내도 이 후 절대로 찾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이유에서든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니 병원에서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다.
그러니 아기를 기르려는 분이 있으면 쾌히 승낙해 달라는 부탁과 사죄의 내용이었다.
황 여사는 생각 할 필요 없이 바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자신이 기르겠다며 주연의 병원비용을 모두 지불하고 아이를 안고 갔다.
황 여사가 아이를 집으로 안고 들어오자 유비가 깜짝 놀라서 웬 아이냐고 물었다. 한숨을 길게 쉬고 나서 황 여사는 말했다.
"주연이 낳은 너의 아들이다."
유비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쓰러질 뻔하였다. 말을 잇지 못하고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비에게 황 여사는 다시 한 번 말해 주었다.
“너의 잘못으로 태어 난 너의 아들이야.”
그러자 유비가 털썩 주저앉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황 여사도 어처구니없는 이 일을 누굴 탓 하겠느냐며 같이 소리 내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