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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창고


BY 자화상 2008-09-08

비밀 창고
 

 

5장 비밀 창고

 

5년 전 늦가을 어느 날을 기억에서 떠 올리며 황 여사는 다시 긴 한숨을 들이마셨다.

황 여사가 일하는 산부인과에서였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였지만, 청바지를 입고 있는 차림새로 보아 아직 대학 초년생인 듯한 여학생이 산부인과 비상계단에서 울고 있었다.

점심 배식 판을 들고 지나가던 황 여사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 여학생이 고개를 약간 들고 눈물을 닦으며 비껴 지나가도록 몸을 틀어 앉았다.

그 때 황 여사는 흠칫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여학생이었다.

이웃집에 하숙하고 있는 주연이라는 이름의 참한 처녀였다.

황 여사는 주연을 그렇게 인식하였었다.

 

그러니까 그 해 봄 이었다. 날씨가 아주 따뜻한 일요일 오전이었다.

주연의 하숙집 주인 김 여사가 꽃밭에 꽃씨를 심고 있었다. 목욕을 다녀오던 황 여사는 다가가 구경을 하며 얘기하고 있었다. 그 때 참하게 보이는 여학생이 외출을 하는지 두 사람의 옆을 지나갔다. 그러자 김 여사는 그 여학생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학생이 무척 머리 좋은 수재라네.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어. 착하고 얌전하고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처녀야.”

하며 마치 자기의 딸 자랑하듯 주연을 칭찬 하는 것이었다. 황 여사는 그 이후부터 주연이를 보면 그냥 예뻐 보였다.

그래서 황 여사는 목적 없이 주연의 행동 하나마다 관망하며 얘가 괜찮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다. 그렇다고 자신의 아들 유비와 엮어볼까 하는 마음은 갖지 않았다. 그저 틈틈이 뭐하는지 어디 다녀오는지 부엌 창문을 통해 한 번씩 찾아 볼 정도였다.

 

이웃 3층 주택의 2층에 살고 있는 주연의 방 창문이 나란히 서 있는 연립주택 3층에 사는 황 여사의 부엌 창과 마주보고 있다. 그래서 황 여사는 본의 아니게 자꾸 창문 너머로 눈길이 가서 내려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때론 어쩌다 주연이 커튼을 걷어 올리고 청소를 할 때면 마치 스토커처럼 주연이 알아채지 못하게 몸을 숨기고 슬쩍슬쩍 내다보기도 했었다.

그랬는데 정작 주연은 그러한 황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아예 이웃에 누가 사는지 신경 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그러니 황 여사를 어디서 보든 이웃집에 사는 어른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한 할 터였다.

한 번도 인사말을 주고받은 적이 없다. 더더구나 마주쳐 본적 없고 눈빛을 교환 해 본적도 없었다. 그리고 위 층 창으로 내려다보며 자신을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를 것 이라고 황 여사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산부인과 비상계단에서 울고 있다가 마주쳤지만, 황 여사를 전혀 개의치 않았으리. 황 여사는 그 때가지 보아 왔던 주연의 다른 모습에 몹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쩌다 저리 되었을까 안타까워 쉽게 걸음을 옮길 수 가 없었다. 한편으론 주연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천만 다행으로 여겼다.

황 여사는 급히 배식 판을 주방에 두고 다시 비상계단 쪽으로 나가 보았다. 주연은 이미 가고 없었다. 그래서 접수대로 빠른 걸음에 달려갔다.

조금 전 주연이라는 여학생이 진찰 받고 갔지?”

하고 묻자 정간호사 눈을 똥그랗게 뜨고 오히려 물었다.

황 여사님이 그 여학생을 어떻게 아는데요?”

응 친구 딸인데 무슨 일인지 알고 싶어서 그래.”

알려주면 안 되는데.”

정 간호사. 주연이는 내 딸 같은 아이야. 알아야 돼.”

그럼 비밀 이예요.”

알았어. 절대 무슨 일 없을 테니 말해줘.”

황 여사가 사정하자 정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서너 달 전에 성 폭행을 당했대요.

그런데 그 때 임신이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야 의심이 가서 진찰 받으러 왔는데 임신 5개월이다. 낙태 수술은 위험하다고 하니 학생이 울고 갔다고 자세히 전해 주는 것이었다.

황 여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쌍한 것, 그 아이가 불쌍해서 어쩌나. 한 번씩 슬쩍 볼 때면 전과 달리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여 짠하고 안 돼 보여 마음이 답답했는데 임신을 했다니. 황 여사는 현기증으로 이마에 손을 얹다가 맥이 풀린 걸음으로 주방에 돌아와 의자에 펄썩 몸을 맡겼다.

 

그 날 밤에 황 여사는 주연의 하숙집 주인 김 여사를 찾아가 만났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주연의 신상에 대해서 물었다. 김 여사는 지나는 말로 주연이 대학 2학년이며 집은 충청도 어느 산골마을이라 했다. 김 여사의 고향에서 4km 떨어진 마을에 주연의 부모가 사는데 괜찮게 사는 집안이라 했다.

주연이 대학 졸업하고 유학을 갈 거라며 그런데 서너 달 전 도둑맞은 후부터 아이가 뭔지 모르게 달라졌다고 하였다.

말 수도 적어지고 어쩌다 보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기도 한다고 하였다. 황 여사는 아마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는가 보다고 떠 보았다. 김 여사는 손 사레를 치며 절대 그런 일은 아닌 것 같다고 고개까지 흔들며 부정을 하였다.

 

황 여사는 집으로 돌아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안정이 안 되어 좌불안석으로 부엌 창을 통하여 주연이 뭐하는지 살피다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거실의 소파에 들어 누워버렸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아들 유비의 방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편지 한 장 없는 유비가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황 여사는 믿었다. 그 놈이 어디선가 살아있을 거라고 꼭 살아 있어야 한다고 황 여사는 그리 믿었다.

유비의 방문을 닫고 황 여사는 작은 방을 거쳐서 다용도실의 벽장을 열었다. 그리고 상자를 들고 나와 뚜껑을 열었다. 하얀색의 조깅화는 닳아지지 않았는데 빛이 바랬다. 유비가 단 하루 신고 나갔다 온 조깅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