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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지계 (萬年之計)


BY 자화상 2008-09-03

만년지계 (萬年之計)


 

제 2장 만년지계 (萬年之計)

 

유비는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실체를 드러내 보였다. 자랑할 것 없는 집안 내력 이었지만, 그녀에게 다 말하고 싶었다.

구청에 근무하셨던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였지요.”

. 그랬군요.”

주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유비의 눈을 마주 보았다.

흐음~, 저는 어려서 몰랐는데 크면서 친척들에게 들었습니다. 막 서른의 나이에 혼자되신 어머니께 다행히 아버지는 재산을 남겨 주셨답니다. 그래서 우리 남매 기르며 사는데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답니다. 그런데도 굳이 힘든 일을 찾아 하시며 돈을 버셨다는 거예요.”

유비는 한 번 길게 숨을 내 쉬었다.

제가 다 자라서 성인이 된 다음에야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젊으신 어머니께서 우리 남매가 채워 드리지 못하는 외로움이 당연히 있으셨겠지요. 그 외로움을 쉬지 않고 바쁜 일로 견디어 내신 겁니다. 궂은일은 다 하셨어요. 아마 식당주방에서 제일 많은 세월을 보내셨을 겁니다. 몇 해 전까지 서울 강서구의 개인 산부인과 병원 식당에서 조리사로 일하셨습니다.”

강서구의 개인 산부인과라는 말에 주연이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바로 큰 눈을 지그시 감더니 다시 눈에 힘을 주듯이 반짝 뜨고 다시 유비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유비는 그러는 주연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저희 어머니 여러 가지로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아직도 미혼이라 어머니께 효도를 다 못하고 있는 중이지요. 하하.”

“......”

주연은 자기도 마찬가지라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를 했다.

그리고 저보다 세 살 적은 여동생이 있습니다. 벌써 스물일곱 살 되었네요. 그런데 아직 미혼 이예요. 지금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어요.”

흐음~, 제가 어서 결혼을 해야 자기도 시집간다며 제 등 떠밀고 있답니다. 하하.”

동생 소개를 유쾌하게 하고 나서 유비는 입술을 한 번 굳게 다물더니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연은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은 유비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앞을 보았다. 혼자서는 다 껴안을 수 없을 것 같고 짐작으로 두 아름정도는 되겠다 싶은 우람한 벚나무가 있었다. 엄청 헤아릴 수 없는 세월에 온갖 풍상을 이겨낸 듯 누구도 받아들일 것 같은 넉넉한 품이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주연은 어린애마냥 달려가 굵은 가지위에 올라서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끝을 올려다보니 지붕처럼 하늘을 가린 가지 사이로 한 조각의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유유히 떠가는 구름들이 아름다워 눈 맞춤을 하고 있는데 유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게 아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주연은 휙 고개를 돌렸다.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뜨고 유비를 쳐다보았다. 잘못 들었나 싶어 양미간을 찡그리며 귀를 기울이는 주연을 보며 유비는 다음 말을 이었다.

“4년 전 막 태어난 아이를 입양 했었어요. 벌써 다섯 살이 되었네요. 지금은 어린이 집에 보내고 있답니다.”

유비가 예상했던 대로 주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래도 유비는 말을 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먼저 고백을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놀라셨나 봅니다. 제게 아이가 있다는 건 못 들으신 것 같군요.”

, .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사과부터 드려야겠군요. 저는 다 전해 들으신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망 하였겠군요.”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여기서 그만 일어서야 할 것 같은데 궁금해졌어요. 어떻게 남자가 미혼으로 아이 입양을 생각하시게 되었는지 듣고 싶군요.”

하하. 그러시겠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아이의 부모가 친척 사촌 동생이었어요. 부부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했지요. 심한 부상으로 아이 아빠가 먼저 죽었어요. 만삭이던 아이 엄마는 겨우 아이를 낳고 죽었답니다. 사촌 동생도 부모를 차례로 잃어서 형제가 없었지요. 그래서 갓난아이를 맡아 길러 줄 친척이 없었어요. 아기 엄마 친정 쪽도 형편이 안 되어 아이를 포기하려 해서 저의 어머니께서 핏덩이 아이를 맡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랬군요. 그런 사정이 있었네요. 그럼 동생으로 기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양자로 맞아들일 생각을 하셨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네요.”

. 처음엔 동생으로 기를까 고민 했었어요. 헌데 어머니께서 연세가 있으셔서 아이의 장래를 위해 제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아 양자로 들였습니다.”

~, 좋은 생각은 하셨는데 그래도 그 쪽의 결혼에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안하셨나요?”

흐음~, 당연히 고민 했지요. 그러나 마음 좋은 여자 분을 만나면 이해를 해 줄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결혼을 못하셨군요. 하긴 요즘 세상에 어느 여자 분이 양자가 있는 총각에게 호감을 느끼겠습니까. 더구나 아이까지 맡아 길러야 하는데, 쉽지 않겠지요. 저 역시 조금 전까지 그 쪽에게 느꼈던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는걸요.”

주연의 말에 유비는 당연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틀림없이 주연이 결혼을 해 줄 거라고 확신을 했다. 왜냐면 유성이가 있으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때마침 두 사람의 앞으로 팔짱을 낀 다정한 연인이 지나갔다. 유비는 그 사람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무관심 했다. 마음속에는 오직 주연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주연은 유비가 말을 끊고 있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자신의 까만 구두코에 날아와 주저앉은 참죽나무 잎을 치워내었다.

유비는 주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만남을 포기하기 전에 어떻게든 주연의 관심을 사야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히든카드는 절대로 꺼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운명에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첫 만남에 주연씨에게 예고 없이 너무 큰 충격을 드려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제 아들을 꼭 한번 보여드리고 싶어요.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운 녀석이거든요. 왠지 주연씨에게 제 아들 유성이를 자랑하고 싶어졌어요. 뭐 크게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친구의 아이를 보듯이 자연스럽게 한번만 만나 보실래요? 아마 마음에 드실 것 같은데.”

,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하. 빠른 시일 안에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연은 고개만 끄덕이며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유비가 그러는 주연을 바라보자

"그냥 습관 이예요."

하고 신경 쓰지 말라는 투로 정중히 말했다.

"혹시 오늘 만남을 후회하시는 것은 아닌지."

유비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솔직히 전혀 뜻밖의 문제에 실망감이 없지는 않아요. 그래서 저에게 조금이라도 기대는 갖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후로의 만남은 소개와는 상관없이 제 마음이 허락되면 연락 하겠어요.”

주연은 다시 숨을 길게 들이 마시고 소리 없이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섰다. 유비는 순간 애처로워 보이는 주연에게 강한 연민을 느꼈다. 생각 같아서는 그 비밀을 다 털어내 보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5년간 가슴속에 묻어 둔 사연이며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그 일을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기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한 유비의 마음을 주연이 알아 줄 리가 없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속으로 괴롭고 힘든 유비에게 주연은 만나서 반가웠다는 인사말을 하며 일어섰다. 둘이는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주연은 처음과는 다른 무거운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똑똑 구두 발자국 소리를 흘리며 걸어가는 주연의 치마 끝자락에서 긴 여운이 날아올랐다. 유비는 드디어 만년지계의 관문을 열어젖힌 두 손에 진땀이 나고 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