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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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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분수 (2)


BY 둘리나라 2007-09-16

 

바닷가마을. 옹기종기 모여 고기잡이로 생활을 엮어나가던 그물 같은 삶들이 대부분인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여상도 아니고 인문계를 나왔기에, 다른 친구들보다 많이 배웠다는 어쭙잖은 콧대에 웬만한 직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른 집 가스나들은 중핵교 졸업해도 공장에 취직해 돈도 꼬박꼬박 잘 보내고 집안에 보탬도 된다카는데 니는 도대체 뭐 하는 기고 잉? 고등핵교꺼지 어렵게 보냈더니 대가리에 먹물 들었다고 힘든 일은 안할라꼬 그라제. 집구석에서 밥만 축내재. 인간이 우째 그 모양이고. 말 좀 해보 거라 니도 생각이 있을꺼 아이가. 내가 저놈의 가스나 땜에 미치고 환장하겠다.”


오징어 배를 따며 엄마는 입버릇처럼 잔소리를 시작했다. 잘려 나온 내장들이 소쿠리에 담기기 시작하면 비릿한 냄새가 코끝에서 온몸을 휘감았다. 유난히 비위가 약한 나는 구역질을 하기 일쑤였고 ‘이 정도도 못 참으면 뭐해먹고 살끼고’ 라는 가시 돋친 말이 또 날아 들어왔다. ‘외동딸이라 고생 안 시키고 키웠는데 애를 바보 만들었다’며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찼고, 골칫덩어리가 된 나는 집보다는 바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차 많아졌다.

바위에 앉아 갈매기를 보았다. 몸에 날개가 달리는 상상을 하며 백사장을 바다 위를 날았지만 지긋지긋한 비린내를 탈출할 수가 없었다.

학교 때는 제법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 인기도 많아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었는데 스무 살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는 게 피곤하고 혼란스럽고 짜증만 났다. 꿈을 꾸어도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꿈만 꾸었다. 숨 막히는 하루하루에 종지부를 찍는 일은 결혼이라는 비상구뿐임을 자각한 나는 그곳으로 향하는 문을 과감하게 열었다.


친구의 오빠. 나는 영악하게도 부모님이 안 계신 친구의 오빠를 골랐다. 고깃배를 타지 않는다는 게 중요했고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조금 많은 게 흠 이였지만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반대를 하셨던 아버지와 엄마도 남편의 성실함과 심성을 보고는 결국 허락을 하셨고 순서대로 결혼식은 진행되었다. 스무 살의 신부와 서른네 살의 신랑은 마을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행복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주례를 맡은 이장님은 연방 이마의 땀을 훔치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에 또. 결혼은 두 사람만의 약속이 아닙니다. 여기 오신 분들과의 약속입니다. 에 또.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고 아껴주고 살아야 합니다. 에 또.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내 인생은 보랏빛으로 가득하리라 믿었다. 바닷가를 벗어나 읍내의 아파트에 신혼의 보금자리가 꾸며 질 때만 해도 영원히 함께 하자며 손가락을 걸 때만 해도, 삶은 탄탄대로의 연속이라는 착각 속에서 말도 안 되는 부푼 꿈을 꾸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지만. 사랑! 그까짓 거 개에게나 던져줄 먹다버린 뼈다귀보다 못한 것이었다.


사랑. 애당초 나에게 그런 감정은 필요가 없었다. 필요에 의해 택한 결혼이었기에 사랑보다는 비린내 나는 사슬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깊게 지배를 했고, 엄마의 잔소리에서 해방된 마음이 너무 편하고 좋았다. 단 세 번 만나서 한 달 만에 결혼을 했는데 가슴 시린 사랑을 어떻게 알 수가 있었을까. 그저 어리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적당한 잘못은 용서가 되고 남편은 노총각 딱지를 떼 준 내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애정공세를 가했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우리색시가 어디 숨었다 이제 온 거니? 정말 내색시가 맞니? 어디 보자. 응”


회사 마치기가 무섭게 달려와서는 얼굴에 뽀뽀를 하며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며 끌어안고 빙빙 돌리고 입이 째져라 연방 웃었다.

엄마는 바쁜 와중에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딸 덕분(?)에 김치며 밑반찬들을 가져다 날랐고 어린 딸의 철없음을 얘기하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박 서방. 아직 아무 것두 모르는 걸 데려와서 고생이 많을 끼다. 그래두 이해하고 싸우지 말고 잘살아야 한데이. 알겠제.”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친아들처럼 잘 모시고 연희 영원히 사랑해 줄 테니 안심하세요. 이 사위만 믿으십시오.”

“아이구, 착하기도 하재. 법 없이도 살 우리 박 서방. 우째 이리도 착하노.”


법 없이도 산다던 사람. 가만히 생각해보면 법 없이도 산다는 말은 법이 없으면 못산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법 없이도 산다는 건 법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천하무적이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하늘과 땅에 적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적이 많다는 뜻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면 축구를 제일 잘하는 브라질이 축구에 관해서는 천하무적이라는데 왜 다른 나라에서는 브라질을 깨려고 난리를 치는 걸까? 왜 이기려고 수많은 노력을 하는 걸까? 적이 없다는 것은 아주 많은 적을 곁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언제나 양면성을 가지고 세상은 돌아가는 거니까.

법이 있었기에 남편과 엄마는 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맞아서 죽지 않은 것이고, 나에게 찔려 죽지 않은 것이다. 엄마와 남편은 말 그대로 법 없어도 살 사람이었다.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노는 게 너무 지루해서 작은 사무실의 경리로 취직을 했다. 공교롭게도 남편은 다니던 회사에 문제가 생겨 당분간 집에서 쉬게 되었다.


“미안해. 다시 나갈 수 있을 거야. 너 볼 면목이 없다.”

“괜찮아요. 지금까지 수고했으니 푹 쉬다가 다시 일하면 되니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다행히 직장 다니고 있으니 어떻게든 생활은 될 거에요. 엄마가 자주 반찬이랑 김치 가져다주시니 아무 염려 말고 이번기회에 편히 쉬어요. 알았죠?”


쉽게 생각했었다. 사람이 걸어가는 인생의 길 위에 나타난 작은 걸림돌이니 치워버리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삶을 송두리째 흔들 거대한 바윗덩이가 되어 현실에 나타났을 때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 정신을 놓아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선택한 남편에게서 사랑 없는 결혼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알고 나니 세상이 무서웠다. 나는 어이없게도 내 꾀에 속아 넘어간 바보여우가 되고 말았다.

사랑. 그 질긴 탄식의 늪이여.


어장 일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도  엄마는 집에 자주 왔다. 딸이 걱정이 되고 사위가 집에서 놀고 있으니 못 미더워 오시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이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엄마와 남편과 내가 모인 자리의 분위기가 왠지 어색하고 껄끄러웠다. 썰렁함에 시선을 마주치기 불편해 하는 두 사람. 여자의 직감은 빗나간 적 없이 정곡을 찌르니 이 또한 하느님이 주신 필요 없는 기능의 하나인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 박 서방한테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어?”

“아니. 와?”

“그냥. 요즘 엄마랑 준식씨 사이가 예전 같지 않은듯해서. 아들처럼 좋아했잖아. 근데 두 사람 다 영 말도 없고. 나 없을 때 싸우기라도 한 거야?”

“참말로 못하는 말이 엄따. 일은 무슨 일. 박 서방이 일 안하고 집에만 있으니 마음이 좀 거시기 하니까 그래 보이는 갑지.”


엄마는 얼굴까지 빨개져가며 입에 침을 튀기며 부정했다. 손을 내저으며 목소리까지 높이고 화를 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두 사람의 나이차이가 7살밖에 안됐다. 누나와 남동생이라고 해도 되는데 사위와 장모이니 남들의 눈에는 우습게 보일수도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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