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그리고 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는 언제나 아름답다. 불빛들이 부리는 마술 같은 솜씨에 매번 탄복을 하며 하루의 절정을 맞았다. 원균의 모함으로 쉰세 살에 권율 장군 밑에서 백의종군하던 생각이 났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에서 수없이 갈등했던 인간적인 고뇌의 시간. 바다에 비친 별들이 지금 도시의 불빛보다 더 아름답게 물에 반사되어 가슴에 깊은 결의를 다지게 해 주었는데, 지금 세상은 겉만 화려한 물질에 싸여 참자아를 잃어 가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6년 9개월에 걸쳐 ‘난중일기’를 쓰며 삼면이 바다인 조국을 걱정했고,
지금까지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아도 역사적으로 해군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을 때는 국가안정을 유지했으나 해군력이 약했을 때는 외세의 침략을 받아 전국토가 황폐화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해군이 창설된 것은 1945년 11월 11일, 해방병단이 그 모체인데, 1948년에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최초의 제독은 손원일이었는데, 어쨌거나 해군에서는 나를 빼고는 이야기가 안 되는 것 아닌가! 해군 제독은 고사하고 말단 수병까지도 내 생일이나 창설일에 인사 한번 드리러 오는 놈 못 봤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는 놈 없었다. 지금 이 시대의 해군들은 자기의 존재를 알고는 있기나 한가. 수십 차례의 해전을 치르며 나라가 없으면 나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싸웠다. 애국심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참, 얼마 전에 월드컵인가 하는 축구경기를 할 때 붉은 물결이 내 앞을 구름처럼 무리지어 지나갔다. 하루 일당을 주고 모이라고 해도 그렇게 모일 수는 없었다. 나 역시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면서 ‘아직까지는 대한민국의 중심이 흔들리지는 않는구나’ 혼자 흐뭇하기도 했었다. 미래가 밝으면 희망의 새날은 오게 되어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가 버린 도시 위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거리를 쓸며 지나갔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깊게 새겨진 삶의 나이테들을 빗자루에 의지한 채 힘겨운 하루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중심이 기울어 버린 어깨에 인생의 무게들이 짐으로 내려 앉고 있었다. 한숨처럼 바람이 스쳐갔다. 쉰네 살에 노량해전에서 유탄을 맞고 쓰러졌을 때 마지막으로 본 바다의 쓸쓸함이 아마도 저랬을 것이다. 밤은 새벽을 준비하는 전초전이다. 또 다른 내일이 시간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오늘보다는 나은 기분 좋은 날이 되기를 상상하며 선채로 잠을 청했다.
어디선가 파도의 울림처럼 귓가에 시한수가 날아들었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둘러보니 새벽에 보았던 참새가 별 하나를 물고 어깨에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