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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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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영선 2007-03-21

 "됐어. 빨리 문 닫고, 저녁 먹게 나가자. 저녁 먹고 마시지 뭐"

 진구가 덮개가 씌어지지 않은 알몸인 회색빛 에어컨 옆에 달려 있는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8시 23분이었다.

 아버지 가게의 물건들을 소매상점으로 배달하다 시간이 늦어졌다.

 하루에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하면 아버지의 일장연설을 30분 이상 견뎌야 했다.

 또 그 일을 견디는 것 보다 낫겠다 싶어 시간이 늦어지는 줄 알면서도 일을 다 끝내고 났더니, 다른 날보다 늦게 가게에 도착했다.

 "알았어. 지난 번 진구씨 고등학교 동기부부라며 같이 만나 저녁 먹던데, 거기가자."

 여자들은 장소에 대한 기억력이 남자보다 뛰어 났다.

 그래 맞다. 그날 그들 부부가 둘 다 미국인가 어디로 유학을 떠난다고 했었던 것 같았다.

 진구에게 고등학교 친구가 몇 명 있기는 했지만 현수만큼 친한 친구는 없었다.

 공부를 잘 했던 현수와 연애소설을 바꿔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떠나는 현수에게 밥을 사려 했더니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부부는 자기들이 먹자고 했으니 자기들이 계산한다고 그랬었다.

 

 "어디였지? 아 맞다. 이름이 '아프리카'였었나?"

 최 근래에 들어서는 두 달 전에 민정의 오빠인 만식과 회집에서 먹었던 술자리가 밖에서 먹은 일이었고, 동기인 현수와의 그 일이 언제였던지 까마득했지만 진구도 쉽게 이름이 기억났다.

 "그래, 집 가다 보면 오른 쪽으로 빠져서 그 일층에 스포츠 매장 있었잖아. 어딘지 생각나?"

 스포츠 매장까지 기억하는 걸 보니 분위기가 괜찮았나 보다. 다른 여자들처럼 민정도 음식점의 분위기를 따졌다.

 "거기 언제 갔었지?"

 장소는 기억났는데 언제였던지 잘 기억나지 않아서 진구가 물었다.

 "몰라. 기억이 잘 안 나네. 막 여름이 시작되었을 때였지, 아마?"
 민정이 그 일이 기억나지 않는 다는 그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가 결혼 하고 나서 1년 동안을 제외하면 외식한 일이 거의 없었고, 한 푼이라도 모아 분가할 전세 비용을 모으려 애써는 그녀에게 그날 현수부부와 저녁 먹은 일은 잘 잊혀지지 않았을 게 틀림없었다.

 "그래, 그러자. 할 얘기도 있고, 참 기다려봐. 니 선물 차에 두고 왔다."

 가게 출입문에 달려 있는 방울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자 문이 열리고, 딸랑딸랑 소리를 내자 문이 도로 닫혔다.

 

 "어렵게 찾았어. 그저깨 말이야. 일찍 배달 끝내고 이 슬리퍼 찾으러 얼마나 헤맸다고, 겨울에 마음에 드는 슬리퍼가 있어야지."

 진구의 손에는 까만색에 까만 꽃 모양이 두장 달려 있는 굽이 거의 없는 슬리퍼가 들려 있었다.

 "왜?"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민정이 슬리퍼를 받으며 물었다.

 '민정아. 이번 겨울에는 가게에서 발 시려도 이 슬리퍼 신어라. 더 못 보겠어."

 여름은 좀 덜한데 양말을 신는 겨울이 되면 민정은 발에 땀을 많이 흘렸다.

 가게 건너의 피부과에서 처방받아 약을 먹기도 하고 바르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 살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민정이 딱 한 번 그에게 "의사가 스트레스 받지 말래,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겨울에도 발에 아무 것도 신지 말래." 그런 말을 했다.

 아마 입가의 부스럼도 발가락 사이의 피부병과 같은 종류인 듯 했다.

 진구의 어머니는 그 점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여자가 지저분하다는 거였다. 발가락 사이에 허물이 벗어져 가는 민정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가는 그 순간부터 잊지 않고 발에다 덧버선이나 양말을 신었다.

 한 여름에도 민정이 가게에서 팔고 있는 덧버선이나 양말을 신었다.

 침대에서 누워 자면서도 민정은 발가락을 긁어댔다.

 둘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런 생각이 둘의 기억 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저녁 먹을 시간을 훌쩍 넘긴 지금은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상대의 귀에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가게에서 아프리카라는 이름의 그 집까지 진구의 승합차로 20분 정도 걸렸다.

 <6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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