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은 지현의 편지에 대해 부치지 못한 글을 썼다.
지현이 회사 차원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떠난 후에도, 그리고 주영의 아이 지우가 태어난 후에도, 아주 오랜 시간 그 편지는 지현이 보낸 많은 편지 틈에 껴 있었다.
지현이 미국에서 눌러 앉아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글은 영언히 주영 자신의 것이 되어 지현이 몰라도 될 것이며, 지현이 미국에서 돌아온다면 그 글은 지현의 것이 되어 지현의 가슴을 멍들게 할 것임을 알았다.
주영은 지현이 돌아오지 않아 자신의 마음을 모르길 원하기도 했고 지현이 돌아와 자신의 마음을 알 길 원하기도 했 다.
주영에게 지현은 그런 친구였기 때문이다.
지현아 그래. 지현아.
나는 늘 너에게 먼저 내 쪽에서 편질 쓰지 못하고, 한 발 늦게 너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구나.
우선 네 말대로 한 일부터 적을게.
투명 실리콘을 두 개 쯤 사와서 바쁜 오빠(너에게 동욱시)대신 쏘아 놨다. 생전 처음 해 본 일이라 철물점 아저씨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덕지덕지 정도가 아니라 육안으로 보기에 흉한 작품을 완성해 놓았다.
마음씨 좋은 집주인께 열 번 쯤 전화했는데, 그때마다 사람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은 철썩같이 하고는 그 약속만을 뒤로 한 채 시간이 한달이 지나 두 달이 훌쩍 다 되어간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뒤 베란다에 있는 세탁기를 제외한 모든 살림 도구들을 앞 쪽 베란다로 일부 옮기고, 일부는 냉장고 옆으로 식탁 옆으로 대충 정리했다. 뭐 정리하고 보니 걱정할 정도로 짐이 많지 않아서 , 비가 새도 세탁기 부품 하나 정도 못쓰는 것 뿐일 것 같아.
세탁기야 시간이 지나면 수명을 다하기 마련인데, 뭐 그게 일이년쯤 당겨진다고 크게 문제될 건 없단 생각이야.
도중에 세탁기 바닥이나 뒤로 물만 들어가지 않고, 그 때문에 고장만 나지 않는다면 끄떡 없지 않을 까 생각해.
다른 건 몰라도 오빠(그냥 동욱씨라고 적을게. 너희 어머니께서 너네 집에 놀러 갔을 때 내 말 들으시고, 내가 우리 집에 돌아 간 다음에 한마디 하셨다면서? 쟤는 오빠랑 결혼했다니?)가 세탁기 밑에 깔 나무 판은 하나 제작해서 가져온대. 이때껏 자신ㅇ이 마신 술에 대한 보상이라나 뭐라나. 한 마디로 내 고민 한 가지쯤은 들어 주겠다는 그 말이 나쁘지는 않아 좋다고 했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실리콘 작업도 해 주면 안 될까 그랫더니 동욱시가 너 도데체 토목일과 건축일의 차이를 아는 거냐고 한마디 하대. 당연히 모르지.
지현이 너는 오빠가 있어 알긴 알겠구나. 다음에 전화 통화할 일 있으면 너한테 물어 보는 게 빠르겠다. 다리 건설공사와 아파트 건축은 다른 일이래.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라면서 자기는 실리콘 쏘는 그런 일은 한번도 해 보지도 않았고,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니래. 핑계 같지 않냐?
하기야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우리에게도 사람들이 옛날 의상실에 하던 일을 생각하고 '옷은 전부 만들어 입겠네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때때로 어떤 일이든 나와 상관없는 일이면 깊이 이해하려 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세상이란 말이야 그렇지 않니?
그리고 부엌과 붙은 오른 쪽 그 방에 있는 책들을 동욱씨와 같이 그가 쉬는 일요일에 창문 크기가 그 방의 2분의 1정도 밖에 안 되는 부엌 왼쪽 방으로 (그 방이 세탁기가 놓여 있는 뒤 베란다 랑 연결되어 있음. 처음부터 이 곳에 책이랑 책장을 둘걸. 책이랑 책장, 컴퓨터와ㅏ 프린터기, 책상 옮기면서. "손발이 고생이다."라며 내내 투덜거리는 동욱씨였어.)옮겼는데, 동욱씨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먹었지.
나나 너보다 두 살 많을 뿐인데, 요즘은 술 때문인지 동욱씨에게서 기력이 쇠한 우리 아버지를 보는 듯한 혼동이 일어나는 까닭은 뭘까?
하기야 아버지였다면 어머니의 말씀에 일언반구없이 잘 따르셨을거야. 아버지기 아머니를 지극히 사랑해서나 아니고,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그 일만은 철저히 배우셨나봐.
나는 모든 서류상의 문제에서 내 스스로 할 수 밖에 없는 신랑을 두었지만, 우리 어머니는 모든 서류상의 문제, 공과금 하나 조차 스스로 내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의존하시지.
그런 걸 보면 어머니가 잘못된 건지 아버지의 역할이 어머니에게 지대한건지 알 수 없긴 하네.
아버지는 꼼곰하시고, 따지길 좋아하시고, 술을 입에도 못 대시고, 농담도 잘 못 하시고, 키가 크시고, 노래방에서 어쩌다 부르는 노래는 중학교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노래들인데비해 동욱씨는 어떤지 너도 알지?
꼼꼼한 거야 일의 특성상 어쩔 수 없지만, 일을 빼면 다 덜렁대고, 술은 아마 말술을 마식겠지? 모르는 사람한테도 얼마나 농담을 잘하니? 물건값은 여자 뺨치게 깍아 버리고, 아버지보다 키가 한 10센티미터 이상 작을 걸. 노래방 같은데서 노래 부르는 모습은 또 어떻고, 그 안을 다 휘젓고 다니잖아. 그 사람이 동욱씨야. 음주가무에 능한(?)
이렇게 쓰다 보니 지현이 네가 말한 내 성격이 나온다.
분석가니? 너 주영아 그만해. 그냥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안 될까?
어머니는 늘 이런 내 성격을 "언니들은 나를 닮았는데 주영이 너는 너희 아버질 꼭 닮았네."라고 하시며 신기해 하셨지.
너처럼 가슴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이 못된 버릇은 길 가다가 죄 없는 나뭇잎을 똑똑 따서 아무데나 버리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내 버릇처럼 고치기 힘들다는 걸 알아.
나도 모든 문제가 술술 풀려 지금의 상황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내가 공부냐? 재취업이냐?
집 창문 틈으로 비가 계속 샐 것인가? 안 셀 것인가?
동욱씨가 술을 계속 마시고 나를 괴롭힐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하나 더 더하면 삼라만상의 도혜옥씨가 가게를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도혜옥씨는 내가 이 곳 진해에 내려 와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친해진 사람인데 말이야.)
그 모듬 문제들이 시간이 지나면 어떤 쪽으로 든 해결 될 테지. 지현이 너의 말처럼.
지현아 나는 말이야. 지금까지 쓴 글보다는 정말은, 아래의 말을 하고 싶어 펜을 든 거야.
너랑 언니, 너의 어머니 일이 너의 조카 성우라는 생명체를 매개로 하여 잘 해결 된 것 같아 우선 축하해 줄게.
그러나 지현아.
지금의 언니도 네 언니지만, 지난 세월 동안 너와 너의 어머니를 괴롭혔던 사람도 언니였다고 생각해 봤니?
아이 한 명을 사이에 두고 언니 쪽이나 네 어머니 쪽이나 모든 것이 용서된다고 생각하면 오해가 아닐까?
지난 세월 동안 쌓여 있던 서로에 대한 원망이 눈물 한 번 흘리고, 손 한 번 잡았다고 해결 될 것 같지는 않구나. 그건 지현이 네가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 그런거지. 어떤 일도 완전하게 용서될 수는 없지 않겠니? 용서되었다고 믿고 싶을 뿐이지.
또 내 생각에는 누가 누글 용서할 수 있을 것같지 않아.
다만 서로에 대해 상관없어진다면 그 일이 해결되겠지만.
네 아버지께서 돌아 가셨지만 언니가 완전히 아버질 용서한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거니?
그래 지현아 결국은 내 일이 아니고, 지현이 너의 일이므로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너의 의견을 존중해 줄게. 믿고 싶은 진실이 애증이든, 증오든 따지고 보면 나와는 별 상관이 없으니까.
지현이 너의 입을 통해 들었던 언니문제나 그로 인한 재산다툼 문제, 그 일로 내라 놀랐던 것은 아니었더.
세상에 별의별 문제가 산재하니까. 심지어 너의 언니와 언니의 어머니가 아버질 미워해서 그 원한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해도 말이야.
<15편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