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지고 벚나무 잎이 조금씩 진해지는 5월이 되었다.
서울에서 주영에게 지현이 쓴 편지 한통이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지현으리 글씨체였다.
도혜옥을 만난 후 시장을 보고 서점에서 책을 몇 권 골라 아파트 통로로 들어 섰더니 며칠 전에 주소를 물어 보던 지현의 편지 한통과 동욱의 대학에서 온 편지 한통과 주인에게 온 산악회이름이 적힌 한 통이 나란히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지현의 편지는 가로 질러 메고 있던 까만 숄더백에 넣었고, 집 주인의 편지는 반송함에 넣었고, 동욱의 편지는 뜯지 않은 다른 편지가 열통쯤 쌓여 있는 거실서럽장에 넣었다.
매일 만나던 대학 시절에 지현은 자신의 심정을 이메일이 차갑다며 편지글로 대신했다. 지현답다고 그 시절 생각한 주영이었다.
주영에게는 편지를 쓰는 일이 더 어색해 지현의 편지에 대한 답을 이메일로만 보냈다.
대학 시절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꼬박 꼬박 보내던 그 일이 서로 다른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번, 육 개월에 한번 하더니, 어느날 서로 간의 편지 왕래가 뚝 끊어져 버렸다.
대신 휴대폰이 불이 나긴 했다. 주영은 시간 날 때 마다 지현의 메시지를 일부러 지워야했다.
오랜 만에 보는 친구의 글씨체였다.
외모에 비해 지나친 악필이었다.
글 내용은 그렇지 않지만 주영은 지현의 글씨를 읽으려면 언제나 글씨를 뜯어 봐야 했다.
<보고 싶은 주영아.
나는 늘 이런 말로 내 그리움을 대신 했었지.
보고 있어도 자꾸만 보고 싶었던 너의 얼굴
흰 피부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곱슬곱슬한 가는 머리카락에서 맡아졌던 레블론 샴퓨 냄새.
미국에 형부일 때문에 가 있다던 작은 언니가 보내 주었다는 좀은 견디기 힘들었던 미제 화장품의 강한 냄새.
너 그거 나한테 조금 나눠 주면서, 내 손등에 마구 문지르면서 했던 말 기억나니?
한국인인 언니네 식구가 몸에서 나는 냄새를 가리기 위해 아침에 바르고 나간다고 했었지? 그러면서 조금씩 발라야 한다며.
나는 그 때 약간 슬펐다. 한국인인 네 언니와 형부와 너의 조카가 생각나서.
다 기억나니?
일요일 오후에 대중목욕탕에서 때밀이 아줌마한테 때를 밀고 나왔다며 월요일 강의실에 앉아서 온 몸의 가는 잔털에 돌돌 말린 너의 때를 보고 나보고 뜯어 달라고 했었던 너.
시력이 나빴으면서도 안경은 폼으로만 가지고 다니며 강의실 앞자리만 고집했던 너.
하루 종일 지하상가를 돌아다니며 고작 청바지 한 장을 고르던 너의 고집
주영아. 정말 보고 싶다.
전화 목소리만으로는 너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하기 어렵구나.
손을 꼭 잡고 늦은 저녁 공원 벤치에서 노랗고 빨간 낙엽이라도 보고 싶은데, 지금은 가을이 아니구나.
주영아.
우선 우리 집 문제로 잠시나마 너에게 나의 괴로움이 옮겨졌다면 친구로서 그 정도는 이해해 주렴.
먹기 싫었던 칼국수를 너랑 먹었던 게 수십번도 넘잖아.
나는 정말 네가 좋아하던 빵과 칼국수 같은 밀가루 음식은 별로 좋아할 수 없었지만, 너의 친구였기 때문에 아무 티 내지 않고 먹어 주었지.
그런 날이면 소화제를 먹어야 했고, 밀가구 냄새 때문에 양치질을 몇 번씩 해야 했지만.
주영아 보고 싶다.
결혼 한 너와 약간 소원해졌지만 너의 옆에 오빠라고 부르는 동욱씨가 있겠지만 너의 동욱씨보다 나는 더 너를 잘 안다고 생각해.
같이 했었던 대학 4년이 그립다.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어느 새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고 보면 변해 가는우리 관계의 속도만큼 시간도 그런 모양으로 흘러 가 버리네. 빠르게 말이야.
언니가 말이야. 주영아.
결혼 14년 만에 아일 낳았어.
기적 같은 일 아니니?
그 동안 우리 몰래 안 해 본 시도 없이 다 해 봤나봐. 형부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 애가 생기지 않아서 엄마와 나는 언니한테 말은 안했지만 걱정 많이 했었어.
그런데 기적이라고 밖에 말 할 일 아니니?
언니 나이가 벌써 마흔 셋이야.
지금 그애가 자라 나한테 이모 이모할 나이가 되면 내가 몇 살이나 돼야 하니?
병원에 가서 다른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나이보다 젊은 아기 엄마와 비교했더니 우리 언니가 그 젊은 엄마의 막내 이모뻘이나 된다지 뭐니?
엄마와 내 앞에서 언니가 울었어.
신생아실에 누워 있던 언니의 아들을 같이 볼 때는 그만 언니와 나, 엄마 세 명이 흐느끼기까지 했지 뭐니?
좀 부끄럽긴 했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우리 셋을 쳐다봤으니까.
엄마와 언니를 보고 있었더니 주영아 글쎄 언니가 먼저 엄마의 오른 손을 두 손으로 잡아서 자기 가슴에 끌어안더니 한참을 그렇게 있지 뭐겠니?
이런 소식 네게 알리게 되어 너무 기뻐.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 된 것 같지 않지만.
나는 언니가 본래 따뜻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거든, 진심이 통했을 거야.
왜냐하면 언니는 야망이 많았던 아버지 보담은 말없이 떠나 준 언니의 엄마를 닮았다고 했었거든.
언니의 엄마는 얼마 전에 돌아 가셨대. 화장하고 가까운 산에 뿌렸다고 말했어. 언니가.
언니 엄마는 얼마 동안 언니와 살았었나봐. 그 두 사람이 아버지와 우리 엄마를 원망했겠지. 아니 죽은 아버질 더 많이 원망했겠지. 아버지가 그런 원인을 만들었으리까.
자 이쯤해서 우리 언니 문제는 접고, 우리 집 이야기가 길었다. 하지만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나는 이런 내 심정을 글로 꼭 쓰고 싶었어.<13편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