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혜옥은 바쁜 일이 있던지 가게 출입문 여는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가게에서 숨겨진 공간(간단하게 밥을 해 먹는 공간에 가스렌지가 있었다. 한사람이 움직일 공간이 충분했다. 그곳에서 도혜옥은 점심을 해 먹는다고 말했다.)에서 재고품을 수납해 놓은 공간(층계가 나 있어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그 공간은 좁았고, 반 평 남짓)으로 이동하면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다.
무척 바빠 보이는 도혜옥에게 주영은 인사를 할까 말까 하다가 그대로 잠시 서 있었다.
가게 뒤의 공간을 물을 끓여 달라는 도혜옥의 부탁으로 나중에 들여다 볼 일이 있었는데 물건들이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주영에게는 답답하게 보였고, 그 공간이 아주 협소해 주영 정도의 키와 몸무게를 가진 사람은 사용하기 힘들만큼 움직이기 비 좁은 공간이었다.
몸집이 작은 도혜옥은 좁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던지 그녀의 움직임은 재빨랐고, 활기찼다.
"저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나이를 비교하자면 주영은 도혜옥과 자신이 딸과 엄마의 관계일 듯 싶었다.
"아 왔으예? 쪼매만 기다리소. 몇 가지 꺼낼 물건이 있거던예. 이거 끝내고 오늘은 차 한잔 대접 하게예. 그릇 구경하던지. 의자에 않았던지 하이소."
그 말을 듣고 보니 지난 번 도혜옥이 서 있던 자리 오른 편으로 여성의류들이 걸려 있던 자리 아래에 다리 네 개가 쇠로 되어 있고, 앉는 부분이 어른 엉덩이 크기의 동그란 흰색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릇들은 여전히 반짝였다.
주영은 여성의류에 대한 도혜옥의 감각이 형편없음을 알았다.
색상도 봄에 맞지 않았다.
진 베이색 점퍼, 코발트블루의 두꺼운 모직 스웨터, 블랙 인조 가죽 재킷, 브라운 색 블라우스를 보니 주인 도혜옥이 팔 의지가 없는 의류를 봄 상품으로 진열해 놓은 게 분명했다. 봄이라면 적어도 핑크계열이나 하늘색을 닮은 블루 계열이나, 은은한 그린 정도라야 어울렸다.
"손님을 세워 놓고, 않으소. 좁아도 앉으면 편안 할 거라예."
도혜옥은 다시 의자를 권했다.
주영은 고개를 까닥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키가 168센티미터인 주영의 꺽어진 무릎에 그릇들을 올려놓은 진열대 끝이 닿을락 말락 했다.
가게 중앙에는 보통 키의 사람 무릎 높이정도의 네모 모양으로, 여느 아파트 방문의 3분의 2정도 크기로 진열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 두 개의 진열대 때문에 미로찾기처럼 겨우 한 사람이 왔다 갔다 할 수 밖에 없는 길이 만들어졌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서 있을 일이 없기도 하겠지만, 그 통로는 도혜옥에게 별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고, 다만 몸집이 큰 손님인 주영에게는 부딪힐까봐 주의를 기울이게 할 것 같았다.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에 주영이 앉은 의자 하나와 의자 앞과 유리 진열장 옆의자 차 정도만 마실 수 있는 지름 50센티미터인 반으로 접는 접이 식 동그란 원목탁자가 눈에 띄었다.
첫날은 주영이 보지 못한 그것들이 눈에 들어 왔던 것은 도혜옥이 주방 쪽으로 닳아서 귀퉁이에 손때가 묻어 있는 간장 종지만한 1인용 찻잔(다잔) 두 개와 착잔 받침(차탁), 차 주전자(다관), 찻물을 따라 놓은 작은 그릇 (숙우), 1L들이쯤으로 보이는 보온 물병을 쟁반에 담아 가져와서 그 위에 올려놓은 직후였다.
"여기 앉으세요."
주영은 평촌의 어머니가 생각나 자리에서 진열대에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하며 일어섰다.
"아니라예. 앉으소. 아침이라 손님도 없고, 비도 오는데 새댁이 딱 맞춰 왔다 아입니까? 이런 날이라야 차 맛이 지대로지예."
도혜옥이 보은 물병에서 물을 따라 차 그릇에 붓고는 두 개의 찻잔에 물을 조금씩 따라 부어 찻잔을 헹구었다.
그리고 가게 바닥에 그 물을 버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물을 버리는 그릇(퇴수기)이 따로 있었지만 탁자가 좁아 내 오지 않았다고 도혜옥이 말했다.)
보온 물병에서 숙우에 물을 부었다. 시간의 여유를 둔다. 다관에다 숙우에서 물을 따라 부었다. 시간의 여유를 둔다. 이윽고 다관에서 다잔 두 개에 도혜옥이 번갈아 가며 조금씩 우려 진 차를 따른다.
"차라는 게 여유가 없시면 잘 마실 수 없지예. 차는 마셔 봤지예?"
주영은 형식을 갖추어 차를 마신 기억이 없다. 남녀 공학인 고등학교에서 가사시간에 예도라며 다기 다루는 법을 설명 듣기는 했는데, 많은 수의 반 애들이 웅성거리는 바람에 예도는 커녕 선생님은 핏대를 올리고 무슨 난장판처럼 지나갔던 그 기억이 통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했었던 때가 잠깐 스친다.
"아뇨. 보긴 봤는데, 뭐가 뭔지 몰랐고, 이런 다기들을 이용해 차를 마셔 보긴 처음이에요."
주영이 말했다.
"별 거는 없어예. 차물만 적당히 식혀서 왼 손을 찻잔 아래 받쳐서 마시면 되예. 이제 들어 보이소. 너무 오래 둬도 식으면 맛이 없다 아입니까?"
주영과 도혜옥이 동시에 차를 들어 음미 해 가며 조금씩 마신다. 도혜옥이 말대로 차맛이 기가 막히다. 인스턴트 티백용 녹차에서 느낄 수 없는 오묘한 맛이다.
"좋지예?"
"네 뭐라 말하기 힘드네요. 맛이 은은하다고 해야하나. 그러면서도 이 차가 가진 독특한 맛이 나기도 하고."
"그래예? 그 정도면 훌륭한 평이라예. 한 번도 마셔 보지 못한 사람치고는 말이라예."
다시 도혜옥이 보온 물병에서 숙우로 숙우에서 다관으로 다관에서 다잔에 우려낸 차를 붓는 다. 두 사람은 다섯 번 정도 우려 마셨다.
비가 내려 세상이 고요하다.
큰길까지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가게까지 들려 올 법한 차 소리머저 끊긴 듯 했다.
빗줄기가 약간 굵어서였다.
그 소리에 파 묻혀 주영은 세상의 시름을 잊은 사람처럼 평화로웠다.10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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