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기 좋은 곳이라? 맞는 표현이다. 나는 벌써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잊혀져 갔지만 내 기억들은 머리 속 그 어디쯤 자리를 잡고 있어 불쑥불쑥 나타났다.
사실은 단 한가지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카키색 내의 차림으로, 그 피골이 상접한 몸을 하고 방 안에 누워 계시던 그 모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안다.
윤진아빠의 부서진 몸에서 흘러나오던 핏물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할머니의 눈물도 잊지 못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보니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지 않았다. 상현달인가 하현달인가 그쯤의 배가 덜 찬 달이 어둠을 밝혔다.
고모는 이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처자식이 있는 남자를 따라 야밤 도주했다는 첫째고모도 이 길을 따라 저 멀리로 날아갔을 것이다. 아마 고모는 나처럼 견뎌야 했던 삶ㅁ에서 헤맸을 것이다.
훌훌 털고 밝은 세상으로 나왔으면 좋았을 것을, 다른 어둠의 집으로 숨어들어 그녀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고모의 다 큰 아들들이 어둠 속에 숨어 집으로 찾아 온 날이 생각난다.
그런 날에 내가 느끼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 누구에게도 물어 볼 수 없는 부끄러움, 그들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여 어린 나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분위기가 그랬다. 밤은 무얼 숨기기에 좋다고 느꼈다.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본 날도 생생하다. 다 큰 어른인 아버지의 눈 사이로 흘러 내리는 눈물과 기형적인ㄴ 그 울음소리, 영문도 모르는 채 나는 방문 뒤에서 아버지와 할머니를 보고 있었다. 그날, 그날 큰고모가 죽었던 것 같았다. 아버지도 할머니처럼 우셨다. 소리를 삼키며, 그렇게 우셨다.
진실을 알리기에는, 또 알기에는 우리네 인생의 숨은 그림자들이 너무 많다.
오늘도 나는 회사로 출근하려 집을 나왔다.
마을을 벗어나 덜컹거리는 버스 속에서 몇 번 씩 멍해졌다. 세상에는 많은 사건들이 넘쳐 나고 있지만,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우주슈퍼라는 간판의 대형 슈퍼 옆에, 안이 보이지 않게 흰색 선팅지가 붙여진 '꿈 다방'이 있다. 꿈 다방에서 윤진 아빠를 만났었다. 아버지와 선 보던 날을 기억한다.
고모가 고향을 떠난 다음날 앞산의 진달래가 아득해서 산이 꽃밭인 줄 알았다고 어렸을 때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윤진 아빠를 처음 만난 날 아버지와 농로를 걸어며 버스를 기다렸는데, 뒷산과 앞산 진달래 향내를 맡았다. 그날 1시간에 1대 있던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동네 친구 강주를 만났었다. 평범한 청바지 차림에 개나리 꽃 색인 노란색 티셔츠를 받쳐 입은 그 애는 아버지께 인사를 했다.
"니 강주 아이가?"
"예 안녕하십니꺼?"
"그래 어데 가는 길이고?"
"주말이라 집에 왔다 갑니더?"
"니가 올게 대학 졸업반이가?"
"예"
강주는 아버지와 인사를 마치고 나와는 잠깐 방긋 웃는 눈인사로 할 말을 대신했다.
뭔가 묻고 싶은 그녀의 눈을 나는 피했다. 고개를 돌렸다. 그 때 주민등록증이 나온 지 꽤 지났지만, 대학을 다니고 있던 강주나 아버지 옆에 바짝 붙어서 선을 보러 가는 나나 인생을 알기에는 어렸다.
제작년이었다.
여섯살 짜리 딸을 데리고 강주가 친정에 내려왔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애의 얼굴은 내가 윤진아빠를 잃었을 때 그랬었던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가만히 저수지 물을 바라보고 있던 쓸쓸한 그애의 뒷모습이 슬퍼 보였다. 엄마는 강주를 부러워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살림으로 고등학교만 졸업시킨 딸에게 미안해하셨다. 그러나 강주와 나는 할말이 없어서 서로를 찾지 않았다. 그날 저녁 마당 위에서 올려 다 본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강주가 보름달을 봤어야 했는데,,,,,, 그날 이후에도 나는 친정에 내려 온 그앨 먼발치에서 몇 번 더 보았다.
아침에 나는 아이들과 엄마를 집에 두고 검은 색 우산을 펼쳐 들고 출근했다.
내 책상 앞에는 정부장의 책상이 놓여 있다. 그는 얼마 전에 두번째 부인과 이혼했다고 말했다. 책상 아래에는 그두 발 자욱이 없다. 깨끗한 모습으로 떡 버티고 침묵인 채 놓여있다. 얼마되지 않았지만 전에 그가 책상을 차대던 때가 그리웠다. 무슨 일엔가 화를 내는 쪽이 더 그다웠다.
말없이 않아서 나를 바라보는 쓸쓸한 저런 눈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정 부장과 나와 공유한 비밀들은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부담이 되었다.
벌써 한 달의 끝자락이다. 나는 직원들 월급명세서를 작성하기 위해 서류를 꺼냈다. 한글 2002에서 내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월급명세서소식을 열었다.
오늘은 비가내리고 있어 달이 뜨지 않는 날이다. 비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게 계속 내렸다. 이런 날이면 수천 개가 되는 계란을 깨트리고 있는 현장건물에서 여자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사무실까지 들려왔다. 계란 비린내가 심하게 내 코를 마비시키며 헛구역질을 삼키게 만들었더,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