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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 삼겹살 반근이라고 적어 갔기 때문에 등뼈가 붙어 있는 돼지고기를 살 계획은 없었다.
고깃집의 내 나이 또래의 그가 그곳에 서서 작업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적은대로 오징어 , 삼치만 사 가지고 왔을 것이다.
피망과 양송이를 사고, 생선코너로 쇼핑카터를 몰고 있을 때 그가 눈에 띄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네-에, 안녕하세요!"
돼지고기 냄새가 풍기고 있는 그 앞에서 그는 흰색 까운에 두거운 작업용 목장갑을 끼고 부엌칼보다 더 길이가 긴 고기용 칼을 들고 있었다.
"지난 번 그 고기 있죠? 약간 질겼어요."
고기가 그가 말해 준대로 사이다에 40분, 양념에 4시간 정도 재뒀는데도 질겼던 건 사실이다.
"그랬나요? 그럴리가 없는데, 이번에는 제가 안 질긴 부위로 골라 드릴게요."
"이 한 덩이는 좀 많죠."
내가 말했다.
"이 정도요. 네. 좀,얼마나 원하시는데요?"
"지난 번의 반 정도만 주시면 돼요."
"그럼 그 정도 드리고, 제가 질기지 않은 부위로 좋을 걸루다 각다 드릴게요."
"저야 좋죠."
바베큐 양념을 해서 재 놓았다가 저녁 반찬으로 먹으면 될 것 같아 살 계획도 없는 고기를 덥썩 사 버렸다.
그는 몇 번씩이나 연할거라며, 자신이 가져가려던 고기라고 하며 친절하게 칼 집을 마름모 꼴로 내 주기까지 했다.
지난 주 일요일 이곳에서 고기를 샀을 때가 그가 이곳에 4년간 근무하다가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다시 스카웃 되어 이곳으로 온 첫날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날은 칼 집을 넣어 주지 않았지만 자기는 늘 손님들에게 이런 서비스를 베풀기 때문에 단골 손님이 많다고 했다.
그 말에는 자기 일에 자신감에 찬 한 인간의 내면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그 말을 허풍으로 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그러한 태도로 보아 그 말이 사실일 것이다.
아직 여드름도 가시지 않은 그는 선하게 생겼다.
내 육촌 남동생과 왠일인지 그가 닮은 것도 같다.
"맛있게 드십시요. 감사합니다!"
"네 저 땜에 고생하셨어요."
감사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깍뜩이 인사를 한다.
그와 나는 손님과 고깃간의 종업원으로 만났고 나 역시 내 샵의 깍뜻한 손님들에게는 항상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늘 거꾸로 살고 있게 된다.
"뭘요. 안녕히 가십시요."
쇼핑카터에 고기를 넣어 주는 그의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초코 우유 4통-2,800원 적힌 물건을 사 실었다.
오늘은 그와 나의 새로운 관계, 준호가 나를 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어린왕자 이야길 하면서 " 그쪽과 제가 이렇게 해서 관계 맺은 거죠"라고 했을 때 처럼 그와 나의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정말 한국에서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는 서로에 대해 깊이 있는 만남을 절대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서울이 싫었는데, 나는 오늘 고깃간의 그를 안 것이다. 얼굴뿐만 아니라 그의 신념을, 어쩌면 나는 다른 곳에서 고기를 못살지도 모르겠다.
8
은경과 나는 시간 때가 만지 않는다. 그녀와 내가 같이 해야 하는 시간은 고작 하루의 몇 시간 정도이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혹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각자의 생활에 빠지면 그 시간은 정말 짧다.
큰 아버지를 위해 향을 피우던 그날 같으면 우리는 같은 방에서 자지 않는다.
샵에서도 책을 읽지만, 하루 중의 한 두시간을 책을 읽고 나면 어떤 날은 은경과의 섹스시간마저 없다.
든경은 내가 이문세의 CD를 듣거나 정태춘의 CD를 듣는 그런 날이면 내 기분이 엉망인 것을 알아 차리고, 동방신기나 신화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신이 난 걸 알고, 클래식을 듣고 있으면 피곤하다는 걸 알아 차린다.
때때로 이런 음악들이 피곤에 지친 은경과 나의 대화였다.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밤이면 나는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지 않고 60켤레의 운동화를 바라보며 다만 라벤더나 페퍼민트나 로즈메리나 쟈스민 향을 맡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많은 손님들과의 스트레스로 인해 내 정신은 어쩌면 큰 아버지처럼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주일 중 유앨한 휴식 월요일은 어쩌면 내 8일째의 행복의 날이다.
산으로 서점으로 레코드 점으로 혹은 한강로를 따라 아침을 일찌감치 챙겨 먹은 후면 나는 산책을 한다.
다른 나이 든 사람의 빠른 걸음걸이가 싫다
허겁지겁 바쁘게 움직이는 그들은 신호등에서도 참지 못한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또 조바심을 내는 어린 아들을 보며 말했다.
"준호야, 인생은 저 신호등 마냥 빠른 게 아니란다. 네가 오늘 빨리 이 신호등을 건넌다 해도 인생의 모든 신호등을 빨리 걸을 수는 없질 않겠니? 사람은 자기 길이 있는거야. 아버지는 네가 허둥지둥 앞으로 달려 가기만 바라는 게 아니란다. 저 멀리 한강의 유람선도 여유롭게 쳐다보고 산의 나무레서 흔들리는 바람을 느끼는 사람이길 원한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진행되는 거야. 너와 내가 이 산 정사아에서 내려 가길 원하는 이유가 친구들과의 놀이나 지금 빠져 있는 인터넷이나 책이라 해도 지금은 너와 네가 이 꼭대기에서 커피 한잔 쯤 마신다고 뭐 달라질 게 있겠니? 서두러지 마라 준호야. 세월은 지나가고 있고 너의 성장과 아버지의 나이듬이 같은 위치로 흘러 간단다. 오늘 잠깐 이 곳에서 쉰들, 저 아래 낼려가서 길을 건널 때 다음 신호등을 기다린들 별로 달라질 게 없단다."
나는 또 오늘 베낭을 둘러멘다.
베낭 속에 슈퍼에서 산 500밀리리터의 생수병 하나와 배가 고프면 먹으려고 초콜릿 바를 두개 사 넣었다.
어떤 날은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한 잔 사서 들기도 한다.
머리를 정리하기 싫어 한 여름이라도 빵 모자를 쓴다. 신발은 내가 사랑하는 5년이 지나도록 몇 번씩 수선한 스니커즈나 컨버스를 신기도 하고, 런닝화나 등산화를 신기도 한다. 그날 그날 기분 내키는 대로 나의 의상 컨셉은 변한다.
60켤레의 운동화는 전시용이지 신는 용도는 아니다.
나는 그걸 꼭 소유하려던 것은 아니가.
은경이 친구들이나 그녀의 어머니에게 혹은 누군가의 선물로 지갑을 주고는 하지만 나는 팔면 팔았지 절대 남을 주지는 않는다.
운동화를 팔려면 조그마한 표지하나라도 잃어 버리면 안된다. 언젠가 한 번 작은 표지가 없어져서 5만원이나 손해보고 팔았을 때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가 내게 운동화 샵을 차릴때와 빌라 전세금을 대 주었을 때 단서 조항을 붙이셨다. 꼭 한 번뿐이며 전세금에 대한 이자는 5년 뒤부터 받을 것이며 5년 안에 돈을 모으면 그 돈들 돌려 달라고 했다.
이재에 밝지 않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던 것은 아마 당신 아들이 샵을 말알 먹은 그때처럼 돈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을 까봐 그러신 것 같다. 은경과 나는 부자인 부모를 만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나이든 사람처럼 팔자 타령도 하지 않는다. 나와 아버지는 거래를 했다. 인생을 놓고.
영풍문고 앞에 않아 '새로운 인생'을 보고 있는 지금 오전에 동작대교 아래서 보았던어떤 남자 생각이 난다.
동작대교 아래에서 어떤 남자가 혼자 앉아 소주병을 옆에 두고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저 사람 낯부터 무슨 생각을 저토록 열심히 하는거야?'
심각한 내 안의 내가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꺼야. 저 사람은 한강의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술 한잔 하는 거 뿐이겠지.'
초콜릿 바를 먹고 있는 내가 말했다.
심각한 내가 믿는 것과 초콜릿 바를 먹고 있는 내가 믿는것, 어느 것 둘 다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 색깔 소주병만 보이지 않았다면, 그의 먹는 폼은 뭔가 생각하지도 않고, 뭔가 즐기고 있지도 않고, 배가 몹시 고파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대는 남자쯤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그는 그저 배가 고파 딱히 갈데도 없어 다리 저 위의 아파트에서 내려 왔을 것 같다. 월요일 오전이라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고, 두 군데 대 여섯 개의 낚시대를 드리운 남자들이 보였다.
한강에는 장어와 붕어가 낚긴다고 낚시 나온 오십대쯤의 남자가 말해 주었다.
거대한 높이의 63빌딩이 이곳에서도 보였다.
그렇게 4킬로를 걸으면 여의도 한강고수부지가 나올 것 같았다.
오늘은 1킬로 정도만 걷기로 했다.
어제 일요일 너무 많은 손님을 상대해서 오랫동안 걸을 힘이 없다.
준호란 남자와 동작대교 아래의 남자와 낚시를 하고 있던 남자와 새로운 인생을 쓴 남자작가와 바쁠 것이 없다는 우리 아버지 모두 오늘 하루의 휴식은 값질 것이다.
팔자란 말은 늙은이가 쓸 말이지만 8자를 유심히 보면 모래시계를 닮아 있다.
사우나에서 시간을 잭기 위해 돌려 놓던 모래시계.
지금도 아트박사에 가면 그 8자를 닮은 모래시계가 있다.
장난 삼아 노트와 볼펜을 사면서 아까 그 곳에서 8자를 한번 뒤집어 놓고 왔다.
내 모래시계가 뒤집혀지면 인생이 바뀔까?
은경에게 오늘 하루의 일을 말해주면 현실적인 그녀는 모래시계는 모래시계일뿐이라고 말 할 게 분명하다.
향에 취해 몽롱한 나를 보던 그날 늦은 밤, 은경은 나의 굵은 눈물을 보며 꼭 한마디를 던졌다.
"너 눈알 발개지고 싶니? 우리 엄마도 동사무소에서 빌린 혼불인가 뭔가 읽는다고 눈 알이 발개져서 수선일 하고 있었단 말야 . 그냥 자! 내일 일 안 할 거냐? 돈 벌러 가야지 먹고 살지! 너의 눈알은 진실이고, 내 눈알은 거짓이냐? 니가 그러고 있으면 내 눈알도 빨개진 단 말이야. 내일 스케줄 빡빡해. 건너와 자던지 그 방에서 자던지, 어쨌던 신경쓰이니까 그 촛불이나 꺼 주세요. 머리가 아파 . 음악소리 좀 줄여. 지난 번에 옆 집에서 왔다 갔잖아. 일요일 날, 그 아줌마가 신랑이 음악계통에 종사하냐고 묻더라. 위층에는 성악가, 아랫층에는 뮤지션, 무슨 여기가 특수한 직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집합소냐며, 나 그소리 또 듣기 싫거던. 헤드폰을 끼던, 이어폰을 끼던 너 마음대로 하고 잠좀자자. 밥은 먹고 살아야지. 네일 들여다 보려면 내 눈알이 빠진단 말이야."
뭐가 뭔가?
결혼생활로 잃어버린 내 것이 아버지와의 시간뿐 아니라 은경과의 같이 하는 내 시간도 있다는 것을 그날 나는 잊어 버렸다.
현실적인 은경의 시간은 어디에 놓여 있을까?
비 현실적인 나의 시간은 어디에 놓여 있을까?
또 묻고 싶었으나. 나는 또 책장을 넘긴다.
물소리와 사람들 소리가 점점 내 귀에서 멀어져 간다.(8편 끝)
*오늘 병원 가는 날이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약을 받았습니다. 한 주먹,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저녁에 잠이 오면 정상이고 잠이 오지 않으면 비 정상입니다. 혹시 잠 안오는 분 계시면 와인을 서너잔 마시고 산에 올라가서 가슴을 여십시요. 저 물도 못보고 아스팔트 길만 걷다가 병 났습니다. 저는 제가 정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남편과 정신과 의사는 제가 비정상이라고 보았습니다. 41년 만에 처음으로 2006년과 2007년 정신과 병동에서 보냈습니다. 저 그 곳에서 간호사를 대신해서 제 옆 침대의 할머니 목욕3번, 정신을 놓고 잠들던 새벽에 깨어 할머니 일으켜 세웠습니다. 저는 늘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습니다. 저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글때문이던, 돈때문이던, 전세집때문이던 병이 난 건 인정합니다. 새해에는 바르게 선 사람이 되겠습니다.
글이 노트에 적은 대로 재 작업 없이 바로 옮기는 거라 약간 터프할 것 같은데, 지금의 제 신경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읽어 주고 계신분께 다시 한 번 감사 인사 올립니다. 황영선 2007년 1월 22일 날씨 무지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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