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생일 다음날은 으례 나의 월차이자, 정기 검진 날이기도 하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몸이라도 성해야지….
동네 종합병원에 풀코스로 검진을 신청한 나는 각과마다 한바퀴 돌고 있다.
매년 하는 것이지만, 왜 이리 성가신 검사들이 많은 건지….
피를 뽑아 보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좀 있어서 산부인과 검진에 예약 시간보다 한 10분쯤 늦을 것 같다.
헐레벌떡 뛰어 저 앞에 고지가 보이는데, 핑크 유니폼의 간호사가 진료실문을 척 나오더니 이름을 부를 태세를 한다.
"박혜준님"
아싸!!! 시간에 꼭 맞추어 도착했네….
"네!"
"네…."
오잉? 이게 뭔소리?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데 대답을 한 것이야!! 하고 돌아보는데,
내 왼편으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 사모님…. "
"박선생?"
그렇다.
그다지 흔하지도 않은 내 이름에 나와 동시에 대답을 했던 그녀는 바로 복녀였던 것이다.
"저, 누가 박혜준님이세요?
간호사가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전데요."
"저요…."
이번에도 똑같이 대답을 해버렸다.
"아니, 1976년 5월 12일생 박혜준님이 누구냐니까요?"
"전데…."
"저…."
우리가 이름과 생년월일이 같다는 것을 알리가 없는 간호사는 우리가 장난치는 것으로 알았는지 이마가 조금씩 찌푸려지기 시작하더니, 우리를 환자들 대기석에서 멀찌감치 옆으로 모아놓더니 조그마한 소리로 묻는다.
"그럼, 중절 수술받으러 오신 박혜준님은 누구세요?"
"중전? 수술…!!"
"…전데요."
순간, 나는 고개를 홱 돌려 복녀를 쳐다보았다.
복녀는 얼굴이 좀 빨개진 것 같았지만, 내 시선을 무시하고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중전 수술이 뭐지?
요즘에는 복녀같이 중전 팔자가 되려면 수술을 해야하나?
아차아차… 아니지, 아니야.
중절 수술?
그렇다면, 낙태?
복녀가 낙태…라니…?
뭐하나 부러울 것 없는 복받은 잉꼬부부인 닥터 안과 복녀, 굳이 그들에게서 불행을 찾고자 한다면 결혼 10년차인 그들에게 아직 아기가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비극이라면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가끔 병원에 귀여운 여자아이들이 오면 예뻐서 어쩔 줄을 몰라서 스티커도 주고, 사탕도 주고하는 (치과 의사가!!!) 닥터 안이 얼마나 아기소식을 기다리는지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특별히 두사람에게 문제는 없다던데, 불임클리닉을 다녀보고 용하다는 약을 먹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시험관 아기에 이르기까지 안해본 노력없이 다 해보았는데도 이 부부에게는 좀처럼 2세라는 축복만큼은 허락되지 않은 것 처럼 보였다.
현실이 이러할진데, 이 부부에게 아기 소식이라면 경사중의 경사가 아니던가…!
그런데, 왠 난데 없는 낙태란 말이던가...?
모든 검진을 끝내고 나니까, 오후 4시가 가까와진다.
아! 배고파….
어제 저녁에 끓여놓은 곰탕을 떠올리며 기쁘게 병원문을 나서려는데, 자꾸 뭔가가 내 목덜미를 잡는 것 같다.
결국 나는 가던 걸음을 옮겨 산부인과로 향했다.
간호사에게 보호자라고 우겨서 회복실로 들어가보니, 복녀가 눈을 감은 채로 아직 링거를 맞고 있었다.
그 앞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 가만히 복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느것 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복녀의 눈감은 얼굴은,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옅은 그늘이 느껴지는 그것이었다.
잠시 후, 어떤 시선이 느껴졌는지 복녀가 슬며시 감은 눈을 뜨더니 순간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평소 우아하고 얌전하던 복녀가 이렇게 이마의 핏줄이 서도록 흥분하는 것은 처음 본다.
"제가 주제넘은 줄은 알지만요…."
"제발 나가요!!!"
"이 수술, 생각보다 후유증이 좀 있거든요. 현기증도 너무 심해서 아마 택시 잡기도 힘드실거예요."
"뭐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이게 어떤 건지 좀 알거든요…그러니까, 그냥 계세요."
"…"
그제야 복녀는 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나를 결연하게 쳐다본다.
"저, 우리 남편한테는…."
"저 오늘 아무것도 못봤어요, 됐죠? 이제 그냥 눈감고 계세요."
살짝 비틀거리는 복녀를 부축하고 회복실을 나오는데, 그녀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응가를 하고도 남을만큼 지난 것 같은데, 복녀는 한참이 지나도록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던 나는 화장실에 재빨리 뛰어 들어가 앞칸부터 화장실 문을 하나하나 두드려 보기 시작했다.
"사모님….사모님?"
"…"
"사모님…."
"어..어허어엉…어허어엉…"
"저기요, 사모님!!!"
네번째 칸에서 누군가가 통곡을 하고 있는게 들렸다.
복녀가 울고 있었다.
복녀가….
생전 울 일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복녀가 누구보다도 서럽게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그것도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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