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숙은 남자가 떠나갔다고 배신자라고 그렇게 박박 우겼다.
그런데 나는 남편말고도 또 남자가 있다.
한 여자는 하나 있는 남자도 그만 실수로 잃어 버린 것처럼 징징거렸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닌 두 남자를 관리하듯이 끼고 산다.
우습다.
그렇다고 처음엔 죄책감이나 어떤 도덕성을 대입을 시켜 좀 시시껄렁한 양아치같은 느낌도 처음엔 들었는데, 이런 것도 시간이 지나니 싱드렁해지고, 심심해지고 별 거 아닌 일처럼 간단하게 여겨졌다.
하긴 남자들은 첩에 또 다른여자에 어떻게 밥만 먹고사냐고 새참을 애기하고 다른 색다른 것도 골고루 챙겨야 남자답다고 인정되는 다양한 현대인이라고 자부 할 것인데.
어찌됐던 이런 게 내 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본능이라는 성분을 분석해보면 알다가도 짐작 못할 부분에서 하나님도 잘 모른다는 여자의 본능은 여자가 아니고서 도저히 십분의 일도 짐작 못할 성분들이다.
제목도 누가 감독을 했는지 잘모르는 영화 한편을 중간토막에서 유심히 봤는데
결국 끝에선 여자는 죽고 남자는 혼자 그 여자를 추억하며 산다더라는 줄거리를 보고 난 껌씹어 단물 다 빠진 표정으로 그건 당해 봐야 알 수 잇는 거라고 채널을 돌린 적 있었다.
그 죽은 여자에게 그 남자는 빨간구두를 사 주었다. 신델렐라가 유리구두 신는 폼으로 그 여자는 행복해서 죽을 표정으로 사뿐히 그 구두를 신었다. 문득 나는 아직 나의 남자들에게 빨간구두를 사 달라구 한 적도 없지만 뭐를 부탁한 일도 아주 사소한 것도 부탁하지 않았다.
갑자기 전화를 찾았다.
문자를 보내야 한다.
뭐라고 보내야 아주 멋있께 부탁을 하는 걸까.
이런 것도 선수들이나 잘 하는 건데.
결국 현관에 있는 신발장을 열어 보았다.
애들 적어서 구겨 넣은 운동화들이 와르르 굴러 떨어졌다.
딸내미 여름에 신었던 분홍색 끈이 밑창에서 빠져 끈이 빠져 신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아들이 적다고 못 신는 다고 집어 던지더니 그것도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나의 구두는 구리터분한 냄새에 찌들어서 희뿌연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꺼내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신발장 정리를 핑계로 남편에게 말했다.
" 나 빨간구두 신고 싶어?"
" 뭐?"
같이 오래 살다보면 생뚱한 질문도 가끔은 필요하다.
남편은 빨간구두를 신고싶다는 내 말에 어디 갈거냐고 묻는다.
빨간구두를 신고 갈 데나 있는 거여?
왜 못가?
평생 검은 구두만 신으라는 법은 어디 따로 있어?
어떤 남자는 빨간바지에 흰구두만 신고 다닌다고 하더라...나두 그 정도는 아니고
하다못해 단풍놀이가는 데 빨간운동화를 신고가면 것두 괜찮구...
별일이라는 표정이다.
하긴 별일은 별일이지. 생전 뭐 사달라고 졸라댄 적이 없는 마누라였는 데.
또 그 영화에서 그 여자가 그 남자 아이를 가져 둘이서 아기용품 가게에서 손바닥보다 더 작은 신발을 들고 둘이서 웃었는 데. 나도 구두가게에서 앉아서 남편이 신겨주는 빨간구두를 신어보고 행복해서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볼까 하고 거울을 봤는 데.
안하던 짓은 모두 어설프다. 어떻게 웃어야 그럴듯한 행복한 표현이 될까...
영화 속에선 그 남자는 아내가 있고. 그 남자의 여자는 집시였는 데 그래서 그렇게 예술적으로 연기를 한 것일까.
남자의 딸아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득달같이 달려온 아내를 보고 그 남자는 그랬다.
당신 피가 무슨 형이야? 아이는 두 부모의 피를 닮지 않았다. 아내는 단호하게 한 마디 했다.
우선 피를 찾아 수혈을 해요!
그 남자의 아내는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 사생활을 자세히 모르듯이 당신도 나의 사생활을 몰라도 되 잖아요?
두 부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잠시 잠깐 만나는 사이처럼 대화했다.
그 남자의 애인은 이미 죽어서 그가 사준 빨간구두 한 짝만 사물함에 보관 된 추억만 있었고, 여자는 자신이 낳은 딸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