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27일 17:28:08 |
단 한마디로 영숙의 전 남편은 얼어붙은 얼굴이 되었다. 난 두번 쳐다보지 않고 급히 응급실에서 나왔다. 괜히 더 말이라도 해둘 걸 그랬다 싶었다. 나오면서 그 동안 영숙에게 들었던 신세 한탄이 나의 가슴 밑변에서 철렁 철렁 흔들렸다.
지가 얼마나 잘 난 집안에서 태어난 지 모르지만 아마 두고 두고 그 자식마음에서 구더기처럼 파먹는 벌레처럼 내가 기억이 날 거야.. 병신이 될 거여. 아니면 내가 먼저 죽어서 늘 따라다니는 잡귀가 되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돌아오는 길목은 하릴 없이 넓고 긴 길이었다. 병원에 드러누운 영숙이 옆 얼굴이 창백하게 자동차 후사경에 매달려서 자꾸 내 시야에 흔들렸다.
저녁에 아이들을 우리집에 데려가야 되겠다 싶었다. 오랜만에 북적 북적 거리는 저녁식탁 앞에서 보글 보글 끓는 김치찌게 놓고 조금 있으면 너희 엄마가 집에 돌아 올거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분깃점이 점점 다가오고 나는 바쁘게 영숙이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아이들이 마구 놀아도 소리가 시끄럽지 않는 놀이터를 지나고 경비실 지나서 차를 세워두는 데
" 아유~~ 그 1004호네 붙들려 갔다메?" " 언제? 그려서 요즘 통 안보인 거여?"
그럴 줄 알았다고 그러게 법 무서운 줄 모르고 그렇게 여시같이 꼬랑지 흔들고 다니더니 혼 좀 나야 된다고 로비 입구에서 서넛의 여자가 수런거린다. 난 그 옆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그들도 흠칫 나를 보더니 또 다시 아무렇지 않게 숙덕 거렸다.
엘리베이터는 또 5층에 멈춰서서 영 내려오지 않는다. 신경질 내듯이 올라가는 화살표를 꾹꾹 눌렀지만 5층이라고 붉게 점멸한다. 옆에 계단으로 다시 올라가는 게 빠르다 싶어 발을 옮기는 데.
" 저기 성호네 집에 가시는 거예요?" 흰 블라우스에 감색치마를 입은 날씬한 여자가 나에게 말을 붙였다. " 그런데요?" 학습지 교사란다. 성호를 일년 넘게 가르치는 선생인데 영 연락이 안되서 찾아 왔단다. 그리고 교재비도 두달이나 밀려서 수금차 알아보려고 왔단다.
그런데 말 눈치가 되게 퉁명스럽다. 고객의 집에 수금하러 온 우유배달 아줌마나 다름이 없는 말투다. 들어오면서 경비실앞에서 떠드는 여자들 얘기가 이미 귀에 들어갔는 줄 모른다. 나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돈 받을려면 성호엄마랑 통화 하세요?" 여자도 그렇게 해야 되나보다 하면서 왔었다고 전해달라고 하더니 휙 돌아선다. 인사하면 목이 부러지나... 안 전해줄련다. 일부러 밀린 것도 내지 마라고 할 것 같은 심보가 저절로 난다.
성호와 연두가 이미 집에 돌아 와 있었다. 여뉘 때 같으면 동네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아 야 할 아이들이 조용히 집에 앉아 있었다.
" 아줌마! 우리 엄마 만나고 왔어요?" " 응! 조금 있으면 집에 올 수있어 ! 근데 너희들 배 안 고프냐?"
연두가 나의 얼굴에 자기 볼을 부빈다. 히히 웃으면서. 나도 안고 뱅 돌면서 오늘 유치원에서 뭐 먹었어? " 응 ..된장국이랑 밥이랑 그리고 ... 뭐였더라? 응 김! 그리고 사과도 먹었어!" 잘했다고 했다. 잘 먹고 잘 놀아야 감기 안든다. 오늘 저녁엔 아줌마 집에 가서 형이랑 언니랑 맛있는 거 해먹자고 했다. 성호가 순순히 따라온다. 나도 더이상 재촉하지 않을 줄 알았나보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이미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 집에 전화를 하지..밥 좀 넉넉히 해 두게...."
전날 저녁에 집에 못 돌아 온 것은 잘 알고. 성질 급한 여편네가 경찰서에 달려가서 뒤집어 놓지 않았을 까 걱정도 한 눈치다. 성호가 넙죽 인사한다. 초등학교 육학년치고는 제법 늠름한 영숙이 아들이다. 나도 얼른 거들어 저녁을 차리고 아이 넷에 나와 남편이 상 하나를 뱅 둘러 앉았다.
" 아줌마. 고맙게 잘 먹겠습니다." 하고 숟갈을 잡는다. 성호가 그러니 연두가 똑같이 또박 또박 말한다. 딸내미와 아들이 웃는다.
' 야! 이놈들아 ..너희도 한 번 해 봐? 이 밥상 누가 차린거여?" 그제야 두 놈도 잘 먹겠습니다아. 한다.
뜨듯한 된장찌게가 좀 체 식지 않았다. 검은 뚝배기가 바닥이 보이게 성호가 수저로 연신 떠내서 먹는다. "그 놈 복스럽게 먹네...."
순간 지익 지익 내 바지 주머니에서 손전화가 떤다. 화면을 들여다 보니 영숙이 전화다. ' 야..이제 깼냐? " 받자 마자 나는 급하게 물었다. " 언니이... " 힘이 없다. 하긴 기운 찬 목소리는 기대도 안했다. " 응.. 영숙아 얘들 다 우리집에서 지금 밥먹고 있다. 니는 밥 먹었냐?"
한 참 부시럭 거리더니 언니는 지금 밥이 문제여..아이고 온 몸이 두둘겨 맞은 것처럼 아프다고 지금 성호아빠가 여태껏 있다가 내가 꺼지라고 해가지고 낼 또 온다고 하는데. 오든지 가든지 니 맘이라고 했다. 언니 나 잘했지?
히유..... 살아있으니 그 말을 했지....
그리고 또 한가지 말 한게 있는데.. 뭔데? 인제 너하고는 섹스도 안할 거라고 했다. 니이미 나 사는데 그런게 나하고는 아무관계도 없는디..뭐가 이렇게 꼬이고 지랄 같냐고 했다. 언니 나 잘했지?
나도 영숙이도 전화기들고 숨만 쉬는 침묵이 잠시 흘렀다. 옆에는 성호와 연두가 나를 힐끔 힐끔 쳐다보고 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