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무기력한 체 멍하니 창밖만 보라보고 있다.
늘어만 가는 그이의 짜증을 받아 들일 기운조차 이젠 남아 있질 않는 것 같다.
집은 마치 하숙집처럼 되어 버린 것 같다.
그이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마주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헤어지자고 말한다.
마음 한편으로 나 또한 이 생활이 지겹고 너무 힘겨워 차라리 맘 편하게 헤어질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생각 처럼 그리 쉽지 많은 않다.
자신이 없다. 그이와 헤어져 있을 자신이 없는 것이다.
친정 언니는 나의 얘기를 듣고 흔히 말하는 뒷조사..그이의 뒷조사를 의뢰 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나 봤던 그런 일들이 지금 내게 현실로 다가올 줄이야 그 누가 알았던가..
이혼을 할 때 하더라도 확실한 물증과 근거로 위자료라도 받아내야 한다고 한다.
위자료라.. 헤어지는 마당에 그까짓 돈 몇 푼 받아서 뭣하리 그 돈으로 내 인생을 어찌 보상 받으리 하며 난 관심 조차 두질 않았다. 조금은 떨린다. 정말 더 많이 놀랄 일들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내심 걱정이 된다.
오늘도 언제 들어올지 모를 그이를 기다린다. 오늘 내가 밥을 먹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자다 깨다 울다 지쳐 또 자다 깨다..이게 나의 하루 일과이다. 마치 하루가 일년처럼 느껴진다. 난 일본에서 돌아온 후 이런 고통속에서 몇 년을 지내온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 들기도 한다.
결혼사진을 보며 일본이라는 곳에 갔던 지난 날들을 후회도 해보고 행복했던 그 어떤 시절에 너무나 그리워 하염없이 울다 지치고 그이가 트집 아닌 트집으로 잡았던 가시 썪인 이런 저런 말들도 온종일 머릿 속에 맴돈다.
부모님한테 소홀했던 내가 싫다고 한다.
떨어져 있는 동안 정이 식어 내가 싫다고 한다.
자꾸 눈물만 흘리는 내가 싫다고 한다.
헤어지자고 하는데 싫다고 하는 내가 정말 싫다고 한다.
바보처럼 자기만 바라보는 게 정말 싫다고 한다.
그래서 자꾸 헤어지자고 한다.
지금은 저녁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다.
벨이 한 번 두 번 세 번..전화를 받질 않는다.
전화가 걸려 온다.
“왜..”
“어디야?”
난 힘없이 말한다.
“어디면?”
“나 아퍼.. 배가 너무 아파서 미치겠어..약도 찾아 봤는데 없고..”
“그래서..”
짜증 섞인 목소리다.
“아파서 죽을 것 같다구..약 좀 사가지고 오면 안될까?”
“진짜 짜증나게 하네.. 기다려..”
전화를 뚝 끊어 버린다.
정말 한 20정도 흘렀을까..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다.
“누구세요?”
“나”
약봉지를 안방에 그냥 던진다.
“고마워”
그게 다다. 어디서 왔는지 그렇게 빨리 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고 약을 던질 수 가 있을까.
약을 받은 난 또 다시 서러운 눈물을 흘린다.
남이라도 이러지는 못 할 텐데.. 많이 아프냐고 한마디도 묻지 않은 채 그저 귀찮은 존재 인양 약을 던지는 그 사람이 너무 밉고 싫다.
시간이 흘러도 마음을 다 잡을 수 없을 만큼 너무 힘들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서럽다.
장식장에 놓여져 있는 양주병을 꺼냈다. 글라스에 가득 체운 채 단숨에 마셔 버렸다.
마셔도 물을 마신 듯 아무 느낌이 없다. 또 한잔을 가득 체워 단숨에 마셔 버렸다.
장식장 유리에 비친 눈물 번벅이 된 내 모습을 바라보자니 미칠 것 만 같았다.
죽고 싶다. 물거품이 되어 영영 사라지고 싶다..
난 칼을 꺼내 손목에 갖다 댓다.
잠시 많이 아플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힘껏 힘을 주어 그었다. 이상하다. 아무런 느낌이 나 질 않는다. 생각했던 것 보다 피도 흐르지 않는 것 같다. 난 한번 더 힘껏 힘을 주어 그었다. 빨간 피가 나오기 시작한다. 식탁 위가 피 범범이 되어 가고 있다. 아무런 통증도 없고 아무런 느낌조차 없다.
멍하니 흐르는 피를 바라 보자니 갑자기 너무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러다가 죽는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몸에 오한이 밀려오는 느낌과 지금까지 내가 격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하나 둘씩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너무나도 짧은 기간 내에 너무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내 모습이 애처롭게만 느껴지는 구나..
난 작은방으로 가 자고 있는 그이를 깨우기 시작했다.
“자기야..민석씨..”
“민석씨..민석씨..”
몇 번을 애타게 불러도 요지부동..
한참을 부르니 짜증 썩인 말투로 왜“ 냐며 눈도 뜨지 않은 채 다시 잠을 청하고 있는 이사람.
“나 무서워..눈 좀 떠봐..”
난 울먹이며 그이에게 말했다.
“아.......짜증나게 왜 이래..잠 좀 자자..”
어이가 없다. 나쁜 사람..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나쁜 사람..정말 나쁜 사람..
난 피가 흐르는 손목을 잡은 채 허둥지둥 집을 나왔다.
지금은 새벽 2시..
친정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질 않는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는 울먹이는 내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란다.
“지선아..너 왜 그래..”
“미영아..나 너무 무서워..”
“너 어디야? 무슨 일이야..”
“나 너무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너 어디냐고..”
“집에서 나왔는데 너무 춥고 무서워..”
“일단 택시타고 빨리 우리집으로 와..근처 까지 오면 전화해 나갈테니가..”
“알았어..”
난 그렇게 약간은 정신이 나간 애 마냥 허둥대며 친구 집으로 향했다.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게 그 추운 겨울날씨에 가벼운 옷 차람에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피가 흐르는 손목을 꼭 잡은 채 택시를 타고 친구 집으로 향했다. 가지고 나온 건 핸드폰이 다 였다. 잠실 쪽에 도착 했었을 때 돈 한 푼도 들고 나오지 않은 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친구는 나의 연락을 받고 큰길가 까지 나와 있었다.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고 외투도 걸치지 않은 옷 차림새를 본 친구는 할 말을 잃은 듯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어떻게 된거야..왜 옷은 그렇게 입고 나왔어..”
그때까지 친구는 내 손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리지 못한 듯 하다.
“미영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게 친구는 자기 외투를 벗어 입혀 줬다.
“유진아 어서 집에 가자..일단 집에 가서 얘기하자..”
나는 멍하니 친구를 따라 친구 집으로 갔다.
실내에 들어서서 외투를 받는 순간 친군 내 손목을 발견했다. 다행이도 피는 어느새 멎은 듯 하다.
“너 어떻게 된거야..손목은 왜 이래..너 미쳤어?”
난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져 흐느껴 울고만 있다. 소리내어 울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다.
“너 이렇게 될 동안 민석씬 뭐했어? 집에 안들어 왔어?”
“아니..내가 너무 무서워서 막 깨웠는데..”
“무슨일인데,,무슨일인데 이 지경까지 된거야..답답하다 어서 말좀 해봐..”
난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얘기 했다. 그가 내게 했던 행동들과 모진 말들까지..
“나쁜자식..죽일놈..어디서 지가 헤어지잔 말을 해..
미쳤구나 아주 미쳤어..미신놈..“
“자꾸 헤어지자고 만 해..”
“일단 약부터 바르자..이게 뭐야..천만 다행이야 더 깊이 나갓으면 어쩔라고 그랬어.
바보야 이렇게 하면 죽을 줄 알았어? 너만 아프지 왜 이렇게 미련한 짓을 했어..“
소리도 내지 않을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날 바라보는 친구의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다..
“죽고 싶어..정말 죽고 싶어..”
“이 바보야 죽긴 왜 죽어 누구 좋으라고..죽을려면 그 새끼가 죽어야지 니가 왜 죽냐구..바보같은 소리 한번 만 더 해봐..”
“그 나쁜자식 한테 전화 해 보야겠다. 애를 어떻게 이 지경까지 만들어..나쁜 자식”
“됐어..전화 받지도 않을거야..”
“그나저나 지선아 어떻하니..”
“몰라..나도 모르겠어..”
“바보야 그만 울어.. 얼마나 울었으면 눈이 퉁퉁 부어 있잖아..”
“나 바보같지..내가 봐도 정말 바보 같아.. 그렇게 매정한 그일 보면서도 서러워 울고 있으면서도 이혼만은 못하겠어..떨어져 살 자신이 없어..”
“바보야..그러고 어떻게 살아. 사람 취급도 않하는 것 같은데..지가 사람이야..아무리 바람을 피던 말던 새벽에 울며 깨우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 해..남이라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야..”
“나쁜 사람인 건 알겠는데..”
“암튼 결정을 니가 하는 거지만 난 헤어지는 게 나을 것 같다..그러고 어떻게 하루하루 버티나..빈 껍데기랑 사는 것 도 아니고..너 매일 늦게 들어오고 또 외박하고 다른 년이랑 그렇고 그렇게 나쁜 짓꺼리나 하고 다니는 그 인간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 볼 수 있어? 절대 안돼.. 넌 아마 미쳐버릴 거야..지선아 헤어지는 게 지금은 죽을 만큼 힘들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천번 잘 했다고 생각 들거야..지선아 잘 생각해봐..”
“못해..난 절대 못 헤어져..”
“이 바보야..왜 그래..말이 되는 소리 하지말고 똑바로 생각하라구..”
내 나이 26살..이제 겨우 26살이다. 내게 이런 일들이 닥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땐 그랬다..만약 내 남편이 바람을 피게 되면 홀딱 벗겨서 쫒아 내고 당장 이혼 할거라고 늘 입 버릇 처럼 말했던 나이다. 그렇게 자신 있었던 나이다. 하지만 그 자존심 강했던 이지선은 어딜 가고 이렇게 나약한 이지선 만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순간 순간엔 이러고 사는이 짐승만도 못한 저 인간이랑 당장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너무 너무 미워 잠들어 있는 그를 죽이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순간도 잠시 그이와 함께 보냈던 수많은 아름다웠던 추억과 다정다감했던 그이의 모습과 사랑을 속삭여 줬던 그이의 모습만이 떠오른다. 미운 감정보다는 행복했던 순간들이 자꾸 떠올라 도저히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집을 나와 있는 데도 그이에겐 아무런 소식이 없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다음날 아침 일찍 그이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친구는 아주 심한 욕이라도 퍼 붓고 싶은 심정 이었으나 헤어 질 수 없다는 나의 말에 꾹 참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친구는 그이에게 오늘 저녁에 날 데리고 가라 했다 한다. 하지만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전화 한통도 없다.
친군 그이의 행동에 더욱 화를 냈고 이젠 나를 설득하고 있다. 그런 인간하고는 살 가치가 없다고..이혼하고 새 출발하라고..
이혼.. 이혼이라 나 정말 이런식으로 라도 살 수 있을까?
그인 이혼이 싫다면 그냥 서로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말고 빈 껍데기하고 한번 살아보라 한다. 매정하다 못해 무섭운 사람이다.
화내는 그의 표정 정말 내가 아는 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무섭게 바뀐 사람..
하나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안겨 주십니까..
하나님 차라리 절 데려가 주십시오.
하나님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