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가 부터 그이의 귀가 시간이 점차 늦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서울로 돌아 온지 어느덧 열흘이 훌쩍 지나 버리고 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 진다.
혼자 먹는 아침
혼자 먹는 점심
혼자 먹는 저녁..
나또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가족들을 만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이의 말에 의하면 잦은 회식에 귀가가 늦어지고 있다 한다.
처음 그이를 접하게 됐었을 땐 떨어져 있던 시간들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차 그 것 뿐만은 아닌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먼지 모를 불안감이라 할까?..
여자의 직감은 무시 할 수 없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인 온종일 서서 일하는 사람이다.
백화점이라는 곳은 앉아 있기 보다는 하루의 3/2 가량은 줄곧 서서 일한다.
나또한 그 일을 해 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점심시간과 중간의 간식시간..그리고 화장실에서 볼일 볼 때 외엔 줄 곧 온종일 서서 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발에 땀이 많이 나서 사실상 발 냄새가 좀 나기 마련이다. 사람에 따라 다를 수 도 있지만 그 인 다른 사람에 비해 발에 땀이 많이 나는 사람이라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이면 현관에 들어와 신발을 벗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이에게 발 냄새가 나지 않는 것 같다. 이상하다. 그렇게 지독한 냄새를 갖고 있던 사람이었던걸..
일본에 있었을 때 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러 번 전화를 해도 잘 연결이 되질 않고 또 연결 된다 해도 뭐 그리 바쁜지 아주 간단하게 말하고 끊기 바쁘다. 내가 알고 있던 그인 정말이지 짧은 통화라 해도 아무리 바빠도 늘 다정다감하게 말했던 사람인데 왠지 지금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 질 정도다.
또 오늘도 늦는다 한다.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하나보다.
“누구세요?”
“응..나야..”
“왜 그렇게 매일 늦는데?”
“마누라 온지 겨우 열흘 밖에 안 된 것 같은데 너무 하는 거 아냐?”
“미안..그렇게 됐네..직원 하나가 그만 둔다고 해서 송별회를 했어..”
“그래.. 회사일로 늦는 건 알겠는데 조금만 일찍 들어와서 나랑 저녁도 같이 먹고 이런저런 얘기 했으면 좋겠어..사실 자기 나 서울오고 한 3-4일 정도 같이 밥 먹고 쭉 늦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나?..미안..”
“동네도 아직 낮설고 좀 그래..온종일 자기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데..”
“알았어 노력할게..”
더 이상 다그칠 수 없다. 그이가 씻기 위해 욕실로 향한다.
난 나도 모르게 그이의 벚어 놓은 양말에 코를 갖다 댄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이런 발 냄새가 아주 약하게 나는 것 같다.
샤워기에 물을 트는 소릴 듣는 순간 그이의 핸드폰을 열어본다.
가슴이 너무 뛰고 손가락에 힘이 풀려 핸드폰을 그만 떨어 뜨리고 말았다.
최근 수신 번호..
김성수
점장님
매장
..
..
이름 없는 전화번호 016-203-0000
도대체 누굴까..여러 번 찍혀 있는 번호 이름도 없는데 누구한테 이렇게 자주 걸었을까?
난 나도 모르게 반복적으로 찍혀 있는 이 번호들을 외우고 또 외운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 도저히 메모는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멎은 듯 하다. 곧 나올 려고 하는지..
난 재빨리 전화기를 원래 있던 곳에 가져다 놓고 TV를 본다.
“다 씻었어?”
“응..”
“자자..피곤하다..”
“자기 먼저 자 난 낮잠을 자서 그런지 아직은..”
“그래 난 피곤해서 먼저 잘게..”
난 아직도 가슴이 뛰어 어떻게 할 지 모르겠다. 행여나 내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그이가 눈치 체지 않았을까 하는 맘에 더욱 떨려온다.
그인 핸드폰을 가지고 작은 방으로 갔다.
난 아까 외웠던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세가지를 외웠는데 두가지 밖에 생각이 안난다. 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 사람이 누군지 당장 전화를 해 보고 싶은 맘 뿐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면 받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떻 하나?
내 머릿속엔 온통 그 이름 없는 전화번호가 자꾸 맴돈다.
어느덧 새벽 3시가 훌쩍 넘고 있다.
잠을 이룰 수 없어 몇 번을 뒤척 였는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본다.
아니야 아닐꺼야 하며 나 자신에게 주문 아닌 주문을 외어 본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세고 어느덧 아침이 밝아 왔다.
“자기야..오늘도 늦어? 오늘 내가 자기 회사로 가면 안될까?”
“왜?”
“왜긴 그냥 자기 회사 사람들한테도 인사도 하고 끝나고 저녁 먹고 들어 오자구..”
“글세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내가 출근 하고나서 전화 할게”
“알았어..미리 전화 줘 준비하고 나갈 테니까..”
“그래..”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그인 무표정한 얼굴로 내 볼에 뽀뽀를 하고 출근한다.
아주 형식적인 인사표현을 했다.
간밤에 적어 놨던 전화번호를 보고 있다.
그렇게 누군지 궁금했던 난 그만 포기 하기로 했다.
그이를 믿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아닐 거라고 굳게 믿고 싶은 맘뿐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그이 만큼은 그럴 사람이 아닐 거라 믿고 또 믿고 싶다.
점심때가 지나도 연락이 없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해도 되는데 난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다 지쳐 난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전화를 해 본다.
“자기야 많이 바빠?”
“연락이 없어서 내가 전화 했어..”
“미안 좀 바빠서 깜빡했네..있잖아 지선아..미안한데 오늘은 안되겠다. 곧 세일이라 창고 재고 정리 때문에 좀 늦게 끝날 것 같아서..”
“그럼 오늘도 또 늦는다구..몇시에나 올건데?”
“글쎄..12시 다 되서야 갈 것 같은데..끝나면 저녁 먹고 갈테니까..”
“휴..........한숨 밖에 안나 온다..”
“미안 내가 끝나면 다시 전화 할게..”
“됐어..수고해..”
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속상하다. 매일 일 일 일...
너무 답답해 캔맥주를 사기 위해 밖에 나왔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 가슴까지 스산해 져 옴을 느낀다.
까만 비닐 봉지에 캔맥주 2캔을 털래털래 들고 걸어 오는 내 모습이 너무 처량하게 느껴진다. 괜실히 눈물이 난다.
이럴줄 알았으면 공부나 더 하다 올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서러운 눈물에 술 맛 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