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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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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선물


BY 푸른소나무 2006-01-27

 

2. 깜짝 선물


 반갑지 않은 전화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며 솟구치는 미움까지 잘 잠재울 수 있었다. 이것도 나의 인격이 아닐까? 제법 자랑스러운 나였다.

유혜민이란 여자 때문에 사실 많은 상처들을 받고, 또 그 때문에 수없는 밤들을 눈물로 채웠었다.

“다시 한 번 전화만 해봐라. 내가 그 때는 정말이지 제대로 쏴줄 테니.”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안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햇살의 따가움도 잠시, 젖어드는 쓸쓸함이 나를 휘감았다.

“괜히 전화 받았잖아. 에이, 이젠 전화기도 꺼버려야지.”

그래, 맞다. 집에서 쉴 때는 전화도 때론 짐이 되기에 난 차라리 전화기 전원을 꺼버렸다.

누구든 내가 쉬는 시간에 전화하면 받아주지 않을 테다.

아무리 실연당한 여자라지만, 그 정도의 자유는 누릴 수 있는 있을 테니까.

어젯밤에 마무리했던 편지 한 통이 눈이 띄었다.

어디에도 없을 주인공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저 가엾은 편지.

갑작스레 사라져 버린 한 채영의 자존심도 이젠 땅에 떨어졌나 보다.

오래전에 헤어져 버린 그 남자를 향한 내 마음을 저 편지에 담았으니...


“내가 당신을 사랑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당신이 내게 먼저 다가와 준 건 하늘이 정해준 약속이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만남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필연으로 만난 운명같은 절대적인 약속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 유치해서 자꾸 휴지통으로 내 눈길이 쏠렸다. 그냥 확 집어 넣어버릴까?

혜민이란 기집애보다 내가 못난 건 또 뭐람?

내 안에 가득찬 그 사람 때문에 또 하루를 낭비하는 나를 발견하고 보니, 조금은 씁쓸한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병이라고 걸려 버렸으면 좋았을것을...

3년이란 시간이 내게 남겨준 건, 차가운 기억의 끝을 놓지 못하는 어설픈 나의 몸부림이었다.

이제 그만 지워버릴 때도 되었는데. 에궁, 미련퉁이.


“한 채영씨 계십니까?”

“네, 전데요? 무슨 일이세요?”

“소포가 하나 왔습니다. 여기에 사인해주시구요..”

아니, 누가 날 위해 저렇게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보내주었을까.

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소포 꾸러미를 뜯어보았다. 보낸 사람 이름도 없고, 아니, 도대체 누가 보냈지?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바구니가 보인다. 보석이라도 들어 있을까 싶은 생각에 살짝 바구니를 열어 보았다. 이럴수가?

이건 분명히 내 것이 맞는데...

어떻게 3년도 훨씬 지난 내 물건들이, 그것도 보낸 사람 이름도 없이 나한테 배달이 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기억도 잠시, 갑자기 무서운 생각으로 등줄기에 땀방울이 송송 맺히기 시작했다.

혹시 그 여우가 나를 놀라게 하려고 장난친 건 아닐까.

“채영아, 뭐하니?”

“어머나, 가은이 네가 웬일이니. 내가 집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응, 있잖아. 채영아...”

숨을 헐떡이며 내 방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이가은이란 내 친구였다.

“가은아, 무슨 일인데 그렇게 땀을 흘리면서까지 내게 달려온거니?”

“정말 마치 꿈을 꾼 것 같아 난 아직도 정신이 없다니까.”

가은이는 요즘 들어 이상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며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내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기 이름으로 보낸 사람 이름 하나 없이 3일동안 계속해서 배달된 소포들.

또 밤이면 밤마다 걸려오는 목소리 없는 전화. 가은이가 받기만 하면 끊어버린다는 괴상한 전화.

도저히 이상하고 겁이 나서 채영이에게 달려오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었다는 가은.

어제 받아 보았다는 두꺼운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역시 겉봉투에는 보낸 사람 이름이 없었다.

편지의 내용이다.


채영아, 보고 싶다.

얼마나 너를 그리워하는지 네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스칠 때마다 너의 향기가 나를 채운다....


“아니, 이건?”

“맞지, 채영아? 그때 3년 전에 네가 받았다는 그 편지 맞지? 그 오빠한테...”

“그래, 이 내용은 분명히 진우씨가 내게 보냈던 편지가 맞아.”

강진우가 한 채영에게 보냈던 러브스토리가 분명했다. 그것도 3년이란 시간이 훨씬 지난 빛바랜 편지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 편지는 복사가 된 듯 깨끗한 편지지에 씌어졌다.

“가은아, 난 이 편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넌 이 편지를 받아 보았니?”

“나도 몰라. 그래서 내가 깜짝 놀랐다니까.”

“그럼 전화는 어떻게 된거야? 장난전화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더 놀랄 수밖에 없는거야. 무슨 장난전화를 연속으로 걸고, 또 내 목소리만 듣고 있냐구. 처음엔 나도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서 이렇게 달려온거야.”

정말 이상하다...

나한테 보내진 소포하나, 또 내 친구 가은이에게 보내진 편지 한 통과 연속적인 괴전화.

아무래도 누군가 날 놀리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왜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는건지 모르겠다.

반갑지 않은 선물이 오늘따라 나를 어딘가 모를 어둡고 캄캄한 동굴속으로 밀어넣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