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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풍문


BY 한상군 2006-02-05

                                                    

 

 

 

 

   그 해 겨울은 수희에게 있어 힘든 계절이었다. 우선 많은 꽃을 소비하던 대형 나이트클럽 두 군데가 한꺼번에 거래처 리스트에서 떨어져 나가자 로즈가든을 경영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이 뒤따랐던 것이다. 배용묵이 지배인으로 있던 H호텔 나이트클럽이야 당연히 정리해야 했지만, 크레이지 호스에서도 주문이 끊긴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어요.]

   어느날 저녁, 모처럼 갖는 회식 자리에서 정주임은 술잔을 비우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노병태 회장이 교통사고로 죽은 지 일 주일도 넘었는데, 왜 가게 문을 다시 열지 않는 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크레이지 호스 얘기였다. 직원들은 영업실적이 저조해지자 너나 할 것 없이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거래처를 돌며 꽃꽂이를 대행해주던 아르바이트생들을 대거 해고한 뒤끝이라 모두들 착잡한 표정이었다. 다시 정주임이 주위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노회장은 교통사고로 죽은 게 아니랍니다.]
   [아니 그럼, 누구한테 살해당했단 말이야?]
  
   문과장이 소주를 한 잔 들이켠 뒤 손바닥에 상추를 두어 장 펴놓고 그 위에 고기 몇 점을 푸짐하게 얹으며 물었다. 정주임과 달리 그의 태도는 마치 어느 집 개가 죽었냐는 듯 시큰둥해 보였다.

   [노회장파에선 배철묵파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크레이지 호스가 열흘 가까이 문을 닫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거에요.]
   [전쟁? 하지만 막강한 배회장파에 도전한다는 건 무모한 짓이 아닐까. 또 노병태 회장 밑엔 배회장파를 칠만 한 인물이 없잖아. 중간보스라고 해봐야 전현구, 신희섭, 유세혁이 있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배회장파에 맞서서 싸울만 한 그릇이 못돼.]
   [아니죠. 한 사람 있습니다.]
   [누구?]
   [크레이지 호스의 영업상무 강승민씨.]
   [아, 한 달 전쯤 배용묵의 턱을 부순 벌로 배철묵 회장에게 찾아가 자기 손가락을 잘라 바쳤다는 그 친구?]
   [네. 그 사람이라면 아마 배회장파에서도 만만하게 볼 순 없을 겁니다. 실전무술 실력이 일당백이라 할 정도로 뛰어날 뿐 아니라, 따르는 동생들도 많다고 그래요. 얼마 전엔 노회장이 명령을 내려서 어쩔 수 없이 자기 손가락을 잘랐겠지만, 이제 오야붕이 죽고 없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반기를 들었다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을 거에요.]

   직원들 틈에서 조용히 고기를 굽고 있던 수희는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크레이지 호스의 영업상무라면 얼마 전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진한 키스를 퍼부었던 바로 그 사람 아닌가.

   [항간엔 이런 소문도 떠돌고 있습니다.]

   정주임은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자 문과장이나 미스 조도 술 마시고 고기를 씹다가 덩달아 숨을 죽였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실제 노병태 회장을 제거한 건 배철묵파가 아니라는 거에요. 노회장을 죽인 킬러는, 일본 경시청의 수배를 피해 부산에 잠시 밀입국해 있던 도쿄의 유력한 야쿠자 조직 이나가와파의 전문 히트맨이었다는 겁니다. 일테면 누군가가 제 삼자를 시켜 계획적으로 노회장을 제거한 뒤에 그것을 배철묵파에 뒤집어씌워 전쟁의 명분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죠.]
   [명분? 무지막지한 조직폭력 세계에서도 명분이란 게 필요할까?]

   문과장이 우물우물 고기를 씹다가 피식 웃자 정주임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전 잘 모르겠지만, 그쪽 동네 생리에 대해 훤하게 꿰고 있는 어떤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더라구요. 아무리 잔인하고 무지막지한 주먹세계일지라도 모든 행동에는 명분이 필요한 법이라구요. 그래야만 조직원들의 지지와 충성을 획득할 수가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의 변절과 이반을 막을 수 있다는 거죠.]
   [노병태 회장을 죽인 게 배철묵파가 아니라면, 그럼 일본의 전문 히트맨을 시켜 그를 제거한 사람이 누구라는 거야?]
  
   모두들 정주임을 주목했다. 그는 정말 뭔가 주워들은 게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주임은 곧 딴청을 피우며 정확한 답변을 얼버무리려 했다.

   [그거야 저도 모르죠. 노회장 죽인 범인을 잡는 것은 엄연히 경찰이 할 일이니까요.]

   누굴까. 노병태 회장을 간단히 제거해버리고 배회장파와 지금 한 바탕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혹시 크레이지 호스의 영업상무인 강승민이 사전에 그런 계획을 모의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아닐까.
   그래. 그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자기 조직의 무능한 보스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배짱 좋게 그 죄를 오만불손한 적에게 뒤집어씌워 한 바탕 전쟁을 벌일 수도있을 것이다. 그 정도 인물이라면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능히 그럴 수가 있다.   

   수희는 크레이지 호스에서 그와 처음 맞닥뜨려졌을 때의 장면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배용묵에게 협박 당하여 죽을 듯한 공포감에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돌연 비에 젖은 모습으로 나타나 눈부신 액션으로 악질 깡패를 해치우던 그 모습은 얼마나 멋있었던가. 그리고 크레이지 호스의 한 룸에서 그녀를 소파 등받이에 밀어붙이고 일방적으로 퍼붓던 그 입맞춤은 얼마나 무례하고도 또한 달콤했었던가.

   그날 저녁 승민의 두 눈을 코 앞에서 마주보았을 때 수희는 그가 단순한 깡패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손가락 하나가 잘리워진 채 비참한 모습으로 룸에 처박혀 있던 그의 눈빛에서 수희는 자기 조직으로부터 버림 받은 데 대한 분노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크레이지 호스의 룸 안에서 뜨거운 입맞춤이 계속될 때였다. 너무나 떨리고 숨이 막혀 수희가 두 손으로 가슴을 밀쳐버리자 그는 못이기는 척 진로를 열어주었었다. 그 순간 수희는 그가 건달답지 않게 약간 의로우면서도 지성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뒷골목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사는 건달일망정, 그는 적어도 한강변 고수부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던 한 여자를 잔인하게 겁탈하던 그 운동선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강자에 강하고, 그러나 약자를 대할 때에는 한없이 유약해지는 사람이 진정한 사내가 아니겠는가.

   그랬기 때문일까. 수희는 승민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함부로 인명을 살상하고, 게다가 다른 구역의 무자비한 폭력조직과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큰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게 제발 그가 아니기를 내심 기원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자기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희는 진심으로 그가 다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