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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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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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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섬한 깡패


BY 한상군 2006-01-15

                                                          

 

 

 

 

 


   그날 밤 수희는 집 앞에 도착해서도 벌벌 떨었다. 크레이지 호스의 관리과장이 자기 차로 집까지 태워줘 안전하게 돌아오긴 했지만, 수희는 그날 저녁 자기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이 너무 무서워서 꽃가게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허름한 아파트 현관 앞에 세단이 섰을 때 수희는 물었다.

   [오늘 일 어떻게 처리하실 건가요? 경찰에 신고하실 거죠? 꼭 그렇게 하셔야만 해요.]
  
   수희의 다짐 섞인 얘기를 듣고 재도는 아무 말 없이 씩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가 세단 뒤편으로 돌아 깍듯한 태도로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자 수희는 검정 가죽점퍼로 상체를 감싼 채 조심조심 차에서 내렸다.

   [경찰에 신고해서, 그런 나쁜 놈은 꼭 교도소로 보내야만 해요!]

   물론 배용묵에 관한 얘기였다. 여자 혼자서 장사한다고 함부로 취급하려드는 그런 놈은 큰 벌을 받아 마땅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영 느낌이 좋지 않았었는데, 육 개월도 못가 기어코 그런 일이 벌어지고야 만 것이었다. 애당초 꽃값을 몇 번 주는 척하다가 내리 연체시킨 데에는 그녀를 한 번 어떻게 해보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저 때문에 하루 저녁 장사를 망쳐버려서 어떡하죠?]
   [김사장님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다 그놈 때문이죠. 그리고 참고로 한 말씀 드리자면, 저희들 세계에선 누가 사고 친다고 해서 경찰에 신고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들 세계에선 우리들만의 룰이 따로 있거든요.]
 
   룰이 따로 있다고? 그렇다면 그 룰은 대체 어떤 것일까. 혹시 미국의 갱영화에서 본 것처럼, 사고 친 사람을 근사한 세단에 태워 멀리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선 그 자의 뒷통수에 총알을 한 방 먹이는 그런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수희는 그런 룰을 적용해서라도 배용묵처럼 나쁜 놈은 확실하게 혼내주었으면 싶었다.
 
   [아까, 제게 이 점퍼를 벗어주신 분은...누구...시죠?]
   [크레이지 호스 영업상뭅니다. 우리 형님이시죠.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재도는 여자에게 인사한 후 재빨리 차에 오르더니 곧 사라져버렸다. 아파트 현관 앞에 덩그라니 혼자 남게 되자 수희는 겁먹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수희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욕실로 들어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확인해보았다. 그야말로 거리를 헤매는 미친 여자의 몰골 그대로였다. 그녀의 알몸은 깨진 술병에 자상을 입어 여기저기 보기 흉하게 피가 맺혀 있었다.
   어깨에 걸쳤던 검정 가죽점퍼를 떨군 뒤 수희는 마스카라 때문에 엉망이 된 얼굴을 찬물로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욕실 수납함에 있던 구급상자에서 포비돈요오드를 꺼내 상처를 일일이 소독했다. 소독약이 상처 부위에 떨어질 때마다 몹시 쓰라렸다.
   그때 갑자기 거실의 전화 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수희는 소스라치게 놀라 한참 망설이다가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상대는 뜻밖에도 친구인 선영이었다.

   [엇그제 별 일 없었니?]

   안부 인사를 간단히 나눈 뒤 선영은 지난 주말 미사리 카페 앞에서 헤어진 뒤의 일에 대해 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수희가 난감해 할 때 문득 그녀의 망막에 그 운동선수와 배용묵의 야비한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무슨 일 있었구나?]
   [.....]
   [정말 그래? 정말 무슨 일 있었던 거야?]

   그래. 그날 저녁 한강변 고수부지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졌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이미 그녀는 젊은 사내의 힘을 이길 수 없어 지프 안에서 겁탈을 당했고, 이제와서  고소를 한다고 해봐야 경찰에선 그녀의 행실을 문제 삼을 게 뻔했다.

   [선영아, 나 지금 피곤하거든.]
   [나쁜 자식! 난 그저 네가 솔로니까, 한 번 사귀어보라고 엮어준 건데 만일 그놈이 처음 만난 네게 나쁜 짓을 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 지금 몹시 피곤하니까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
   [그래. 어쨌든 미안해. 하지만 그날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건 내 생각과는 전혀 관계 없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수희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귀찮은 전화 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받아보니 여동생 연희였다.
  
   [오늘 저녁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휴대폰으로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질 않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 했어. 별 일 없는 거지?]
   [그래.]

   수희는 여동생이 걱정할 것 같아서 자세한 얘기를 아예 생략해버렸다.
  
   [연희야, 한 가지 물어봐도 되니?]
   [뭐? 말해봐.]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지배인이나 영업상무 직함을 갖고 있는 남자들은 대개 어떤 사람들이니? 넌 신문사에 있으니까 잘 알 거 아냐.]
   [왜?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그냥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보는 거야.]
   [호텔 나이트클럽의 지배인이나 영업상무쯤 되면 대부분 그 바닥 폭력조직의 중간보스급이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다 그렇진 않겠지만 말야.]

   철렁,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용묵도 그렇지만, 위기의 순간에 그녀를 구해준 크레이지 호스의 그 젊은 영업상무도 조직폭력배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수희는 거두절미하고 여동생에게 간단히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몇몇 나이트클럽에 꽃을 납품하고 있는데, 모두 정리하는 게 좋겠구나.]
   [거래가 깨끗하다면 모르지만, 만일 더티하게 나온다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정리해버리는 게 좋겠지.]

   하지만 수희는 거래를 끊는다 해도 용묵이 어떻게 나올런지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해꼬지를 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올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만일 가게로 찾아와 장사를 못하게 방해하거나 최악의 경우 자기 부하들을 동원해 그녀를 납치하려 덤벼든다면 어떻게 하나.
   수희는 여동생과의 통화를 끝낸 뒤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서성댔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거실 바닥에 뒹굴고 있던 가죽점퍼를 주목했다.
   크레이지 호스의 홀 한 복판에서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을 따름이었지만, 그 젊은 사내는 뒷골목 깡패로 보기엔 신선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핸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상대를 꿰뚫어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더구나 그 사내는 싸움 실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크레이지 호스의 건장한 직원들이 모두 달려들었다가 줄줄이 얻어맞고 나가떨어졌을 때 그는 촉촉히 비에 젖은 모습으로 나타나선 단 한 번의 액션으로 상대를 간단히 제압했던 것이다.
   그의 출현으로 인해 다행히 심각한 봉변은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희는 그날 밤의 사건 때문에 어쩐지 그 사내에게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