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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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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인연


BY 한상군 2006-01-12

                                                         

                                                                      

 

                                                                        

 

 


   여자친구를 근처의 룸살롱에 데려다주고 승민이 크레이지 호스 현관 앞에 오토바이를 세웠을 때 누군가 안에서 다급하게 뛰쳐나오며 외쳤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웨이터 병훈이었다. 그는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흰 와이셔츠는 이미 검붉은 선혈로 펑 젖어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손님 중 한 명이 지금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승민은 오토바이 손잡이에 걸쳐두었던 검정 가죽점퍼에 두 팔을 꿰었다. 그리고 비에 젖은 채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애들은 다 뭐 해?]
   [지금 모두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처리가 안돼?]
   [네. 다 덤벼들었는데, 역부족 같습니다.]
   [.....]

   누굴까. 주먹께나 쓴다는 자기 직계 후배들이 전전긍긍할 정도라면 보통 놈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날뛴단 말인가.
   오토바이를 병훈에게 맡기고 승민은 천천히 붉은 카펫을 밟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이트클럽 현관 문을 조용히 밀고 들어서자 이미 난장판이 된 홀이 눈에 들어왔다.

   손님들이 모두 쫓겨나간 텅 빈 홀 중앙에서 한 사내가 깨진 맥주병을 들고 어떤 여자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그녀의 옷을 죽죽 찢고 있었다. 기도 일을 보던 대준과 규철은 어딜 어떻게 맞았는 지 홀 바닥에 큰 대자로 누워 있었는데, 그들과 한 데 널부러져 있던 재도가 승민을 발견하고 절뚝거리며 달려왔다.

   [형님!]

   재도 역시 머리를 크게 다쳤는 지 이마와 관자놀이께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구야?]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처음 본 놈 같은데, 우리 큰 형님과 잘 아는 사이라고 그러더라구요.]
   [왜 저러는 건데?]
   [여자는 우리 나이트클럽에 꽃을 대주는 로즈가든 사장인데, 아마 저놈이 한 번 먹고 싶어서 수작을 부리다가 말을 잘 듣지 않으니까 술기운을 빌어서 행패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모두들 수수방관하고 있는 가운데 사내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드러난 여자의 흰 목줄기에 날카로운 병끝을 들이대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여자가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재도는 얼른 바닥에 굴러다니던 의자 하나를 들어 사내 쪽으로 내던졌다. 

   [야, 이 새끼야. 그만 두지 못해! 이젠 그 여자를 놔줘!]

   크게 소리친 사람은 재도였지만 사내는 문득 고개를 돌려 승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넌 또 뭐여?]
   [.....]

   승민은 아무 말 없이 얼굴에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재도에게 건네준 뒤 사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승민이 나타나자 일찌감치 피신해 있던 종업원들과 악사들이 무대 위 커어튼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깨진 맥주병들을 발로 툭툭 차고, 쓰러진 의자를 바로 세워놓으면서 승민은 취한을 향해 곧장 나아갔다. 비에 젖은 검정 가죽점퍼가 조명 불빛을 받아 번질거렸다.

   [이 새끼, 너도 죽고 싶어 환장했냐? 이 씨팔 새끼들이 선배 알기를 뭣같이.....]

   선배라는 말이 귀에 거슬렀지만 그러나 승민의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는 홀 바닥에 뒹굴고 있던 기물 하나를 엉거주춤 일어서던 취한의 발치께로 걷어차 그의 주의력을 분산시킨 뒤, 그대로 공중으로 몸을 붕 띄워 한 바퀴 돌면서 구두 끝으로 상대의 턱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와아, 하는 환호성과 함께 사내는 뒤로 두어 바퀴 나뒹굴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재도가 달려가 의자로 머리를 내려치자 쭈욱 뻗어버렸다.

   [형님, 이 새끼를 어떡할까요?]

   재도가 옷소매로 얼굴의 피를 닦으며 물었다.

   [기도실에 끌어다 놔.]
  
   승민은 신경질적으로 한 마디 내뱉곤 홀 중앙에 쓰러져 있던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갈기갈기 찢긴 옷을 추스리다가 승민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이미 눈가의 마스카라는 눈물로 엉망이 돼 있었지만 낯선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심한 모멸감을 느낀 듯 여자는 고개를 푹 떨구더니 다시 어깨를 들썩거렸다.
   승민은 가죽점퍼를 훌훌 벗더니 그것을 재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라도 입혀줘. 그리고, 네 차로 집까지 태워다주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