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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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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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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문


BY 한상군 2006-01-08


                                                   

 

 

 

 

 


   최성수가 스테이지에서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때 국내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누렸었던, 바로 그 가수였다.

        
   어느새 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어봐도 
   그래도 슬픈 마음은 그대로인걸...
               

   이국적인 카페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미사리 강변길을 지나간 적은 여러번 있었지만 직접 카페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희는 지난 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분위기에 곧 익숙하게 젖어들어갔다.

   [요즘 어때?]

   친구들과 함께 맥주 잔을 기울이며 망연히 가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 윤애가 물었다. 이혼 후 혼자서 살아가는 소감을 묻는 것 같았다. 윤애는 전남편이 바람 피운다는 사실을 최초로 그녀에게 제보해준 친구였다.

   [그저 그렇지, 뭐.]
   [힘들지?]

   사실 힘들었다. 여자 몸으로 먹고 살기 위해 직접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게 어찌 힘들지 않으랴.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불현듯 아들 현이 보고 싶어질 때였다. 그럴 때면 수희는 거의 미칠 것만 같았다.
   얼마 전에 수희는 현이 너무 보고 싶어 그 애가 다니는 학교를 찾기도 했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빈틈을 전혀 주지 않고 집으로 데려가는 바람에 수희는 어린 아들을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돌아서야만 했었다.

   [외롭지 않아?]

   윤애가 다시 묻자 옆에 있던 혜정이 팔꿈치로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헤정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난 수희가 부러울 때가 있어. 누구에게 구속되지 않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
   [그래. 이젠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살아.]

   그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선영의 말이었다. 선영은 결혼하지 않고 줄곧 독신으로 살아온 친구였다. 그녀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었는데, 오랫동안 아이들에게 레슨을 해주며 살아오다가 얼마 전부터 수입이 줄어들자 미사리 카페들을 돌며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었다. 혜정이 말했다.

   [이런 얘기 해도 될까?]
   [무슨 얘기?]
   [요즘 소문을 들으니까, 성균씨가 회사에서 미국 지사장으로 발령 받아 내년 초에 한국을 떠날 거라는 거야.]
   [혼자? 아니면...]
   [함께 가려나봐. 지금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라고 들었거든.]

   모두들 수희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술을 마시자 선영이 그녀의 빈 술잔에 맥주를 채워주었다. 윤애가 말했다.

   [차라리 잘 됐지, 뭐.  같은 서울에 살고 있으면 애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될 때도 있겠지만,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은 마음이 좀 덜할 거 아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선영이 테이블 밑으로 수희의 한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애가 크면 반드시 엄마를 찾는 날이 올 거야. 옛날에 엄마 젖도 떼지 못한 채 미국에 입양간 아이들도 요즘 자기를 낳아준 엄마를 찾아 한국에 돌아오기도 하잖니. 아마 현이도 이 다음에 반드시 널 찾게 될 거야.]

   솔직히 수희는 이혼한 이래 하루도 현을 잊은 날이 없었다. 그녀는 아들을 연상케 하는 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기만 해도 문득문득 처연한 심정이 되곤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아들의 양육권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라면 차라리 그 애와 멀리 떨어져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싶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살다가 만에 하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어찌 할 것인가. 수희는 아들의 마음 속에 엄마란 존재가 아프게 남아 있을 것 같아 차마 그 상처가 덧나게 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차라리 새 엄마에게 조금씩 정을 붙여가며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게 훨씬 나을 성 싶었던 것이다.

   그날 혜정과 윤애는 선영이 스테이지에 오르기도 전에 아이들 저녁 밥을 해먹여야 한다며 서둘러 돌아갔다.

   친구들이 자리를 뜬 후 선영은 바로 스테이지에 올라 피아노 연주를 했는데 그녀가 들려준 곡은 흘러간 팝송을 재즈 스타일로 편곡한 것이었다.


   I left my heart in Sanfrancisco
   High on a hill, it calls to me
   To be where little cable cars climb halfway to the stars
   The morning fog may chill the air, I don't care


   선영이 연주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자 웨이터가 샴페인 한 병을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주위를 돌아보자 어떤 사내 둘이 한쪽 구석 테이블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선영은 그들을 잘 아는 듯 수희에게 찡끗 윙크를 하더니 흔쾌히 합석을 허락했다.  
    
   [열렬한 팬입니다. 가끔씩 피아노 치시는 모습을 뵙고 싶을 때마다 찾아오곤 하지요.]

   서로 인사를 나눈 후 한 사내가 수희에게 말했다. 그는 얼굴이 희고 키가 훤칠했다. 옷을 잘 입고 있어서 외양만 봐서는 흡사 패션모델 같았다. 그와 동행한 사내도 키가 컸는데 얼굴이 운동선수처럼 구릿빛이었고 입술이 두터웠다.

   [선곡이 너무 좋아요. 리챠드 크레이더만보다 더 좋습니다. 제 가슴을 두드리는 듯한 연주음을 들을 때면 불쾌한 기억들이 모두 사라지고 로맨틱한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아요.]
   [영광이네요. 호호호.]

   수희가 보기에 두 사내 모두 다섯 살 정도 연하 같았다. 하지만 선영과 패션모델은 아무런 격의 없이 얘기를 주고 받았다. 단순한 재즈 피아니스트와 팬 사이 같지 않았다.
   잠시 후 선영이 다른 카페에서 연주를 하기 위해 일어서자 패션모델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나섰다. 수희가 그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자 선영이 귓속말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잘 해봐. 이제 넌 누구 부인이 아닌, 자연인 김수희라구.]

   두 사람이 카페 밖으로 나가려 하자 운동선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수희는 낯 선 사내와 단둘이 있는 게 너무 어색해 선영의 뒤를 따라나섰다. 선영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 왜 그래? 술이 많이 남았는데 한 잔 더 하지 않고서?]
   [아냐. 너무 늦었어. 이젠 나도 가봐야지.]

   그러자 친구는 수희의 마음을 헤아린 듯 더 이상 낯 선 사람과의 합석을 권유하지 않았다.
   그날 수희는 혜정의 차를 타고 카페를 찾았었기 때문에 집에 돌아갈 마땅한 차편이 없었다. 그래서 선영의 부탁을 받아 운동선수가 수희를 집까지 태워다준다고 했을 때 그녀로선 도저히 마다할 형편이 아니었다.

   카페 주차장에서 친구와 헤어져 서울로 돌아올 때 운동선수는 BMW 지프를 몰며 자기 신상에 대해 두런두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한때 야구를 한 적이 있으며 지금은 팔꿈치를 다쳐 강남에서 조그만 스키샵을 하나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나이 설흔 살이 넘었지만 아직 미혼이며, 현재 가게 근처의 오피스텔에서 강아지 한 마리와 살고 있다. 그 강아지 이름은 졸리인데, 미국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를 무척 좋아해서 그렇게 붙였다. 사실 안젤리나 졸리는 미인은 아니지만 남자가 볼 때 굉장히 섹시한 면이 있다. 특히 그 입술은 마치 흑인의 그것처럼 두터워서 무엇이라도 부드럽게 감싸주고 빨아들일 것만 같은 느낌이...

   그날 카페에서 친구들이 따라준 술을 거의 다 마셨기 때문이었을까. 수희는 지프가 미사리를 벗어나 올림픽대로에 접어들 무렵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경과했을까. 뭔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퍼뜩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누군가 뽀얗게 드러난 자신의 젖가슴을 마구 빨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수희의 몸 위로 상체를 기울인 사람은 물론 카페에서 처음 만난 그 운동선수였다. 그는 이미 여자의 투피스 저고리를 벗겨낸 뒤 브레이지어까지 뜯어낸 상태였으며, 이제 막 커다란 손을 그녀의 스커트 속으로 넣어 팬티 속을 더듬는 중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수희는 지프 안 조수석에 앉은 채 본능적으로 두 다리를 오무리며 양손으로 사내의 가슴을 밀쳤다. 

   [저리 비켜요! 내 몸에 손 대지 말아!]

   아마 신사였으면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점잖게 물러났으리라. 하지만 그는 유감스럽게도 신사가 아니었다. 여자가 거부하는 몸짓으로 발버둥을 쳤으나 사내는 어찌나 힘이 센지 요지부동이었다. 수희는 사정했다.

   [날 내버려둬요. 제발.....]
   [가만 있어. 곧 끝낼 테니까 조금만 참아.]

   나직했지만 매우 위압적인 말투였다. 여차하면 목을 조르거나 주먹까지 휘두를 수도 있는 거친 태도였다. 사내가 강한 완력으로 팬티를 찢고 두 다리를 벌리자 수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여린 속살을 열고 말았다.  
   수희는 사내가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있었다.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내는 여자의 육신을 학대했다. 그는 마치 남편에게 버림 받을 무렵 수희가 혼자 잘 때마다 꿈 속에 나타나 씩씩 거친 숨소리를 귓가에 내뿜으며 겁탈을 하곤 했던 악귀와도 같았다.  
   차창 밖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어두운 하늘에 몇 개 되지 않는 별들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그 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촉촉히 맑은 물에 젖어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