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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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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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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BY 한상군 2005-12-10

                            

 

 

 

 

   [아니,  이게 누구냐.  수희 아니냐?]

   춘천의 고향집은 옛날 그대로였다.  세월이 흘러 지붕의 기와며 철대문 등이 많이 퇴색되고 녹이 슬어 낡은 느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여전히 시장 뒤편 언덕 위에 옛모습 그대로 자리잡고 있었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도 어머니의 고집으로 팔지 않고 살아온,  아픈 추억이 구석구석 서려 있는 한옥이었다.

   [네가 왠 일이냐?  이 시간에 여길 다 오고.....]

   문을 열고들어서자 어머니는 오랫만에 찾아온 맏딸을 거의 껴안다시피 두 손을 감싸쥐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엄마.....]

   울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다.  경춘대로를 달려오면서 아무리 슬픈 마음이 들어도 어머니 앞에서는 결코 눈물을 보여선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몸에 와 닿자 수희는 자신도 모르게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어서 들어가자.]

   마당엔 무우며 호박 등 얇게 썰어놓은 밑반찬 거리가 돗자리에 펼쳐진 채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받고 있었다.  어머니는 뜨게질을 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수희가 안방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뜨게질 감을 한켠으로 밀어놓으며 맏딸을 아랫목에 끌어앉혔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그렇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남서방하고 싸우기라도 한 거냐?  어서 말해봐.  그렇게 울지만 말고.]
   [아녜요.  싸우기는.....]

   핸드백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수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래서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울긴 왜 울어?]
   [시집살이에 고되게 시달리다가 친정 엄마를 보면 눈물이 날 만도 하죠.  안그래요?]
   [시부모와 따로 살면서 무슨 시집살이를 한다고 그래.]
   [따로 산다고 어디 왕래가 없나요?  그건 그렇고 엄마는 요즘 어떠세요?  무릎은 괜찮으세요?]
   [그저 그만 하다.  뭐 퇴행성 관절염이래나 뭐래나.  늙으면 흔히 생기는 거라는데, 잘 낫지도 않는다더라.  너 정말 집에 아무 일도 없는 거냐?]
   [글쎄 그렇다니깐.  엄만 꼭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나 정말 엄마가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시집 간 딸이 친정에 오는데 꼭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내가 운 건 그냥 오랫만에 엄마 모습을 뵈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그래서 운 것 뿐이예요.  정말 나 아무 일도 없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수희는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보인 자신이 미웠다. 
   그날 오후 두 모녀는 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반찬은 된장찌게와 구운 자반 고등어 두 토막,  그리고 여러가지 밑반찬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머니가 맏딸을 위해 새로 꺼낸오이지가 제일 맛이 있었다.  수희는 입이 깔깔하여 밥에 물을 말아 오이지 하나만을 찬으로 점심을 먹었다.
   밥상을 물린 후 어머니는 서울에 사는 여동생 연희에 대해 물었다.  수희는 자기가 아는 대로 답변을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번엔 군청에 다니는 막내 아들이 어언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어 선을 몇 차례 보았으며,  요즈음엔 거의 매일 밤 늦게 귀가하는 것으로 봐서 어떤 색시와 교제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집안 얘기를 들려주었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바로 엇그제 큰 누나 등에 업혀 칭얼거렸던 것 같은데 이젠 장가를 보내야 할 정도로 장성하였구나.  수희는 감회가 새로웠다.  막내로 말하자면 그녀가 거의 키우다시피 했던 동생이었다.

   [더 늦기 전에 가봐야지.  수희야, 자니?]

   어머니가 후식으로 과일을 가져온다며 부엌으로 나간 사이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요 근래 거의 매일 밤 불면에 시달리다가 참으로 오랫만에 옛 고향집 어머니 곁에서 편안하고 안온한 기분을 느끼게 되자 스르르 잠이 들었던 것이다.  눈을 뜨니 어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이 놈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 찾겠다.  어서 집에 가봐라.]

   아들 현은 시어머니가 평창동으로 데려가 지금 집에 없었다.  하지만 수희는 어머니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

   [수희야.  아무리 어렵고 괴로운 일이 있드래도 참아야 한다.]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수희는 눈마저 제대로 떠지질 않아 방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모름지기 여자란 일부종사 해야 하는 게야.  고통스러워서 때로는 죽고 싶다고 해도 자식을 둔 어미는 함부로 처신을 해선 안되는 거란다.  네 속을 내가 왜 모르겠니.  나도 너희 삼 남매를 키우면서 모진 목숨 끊지 못해 이날 이때까지 살아온 사람인데.]

   잠이 밀려왔다.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제껏 못이룬 많은 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런 수희의 귓가에 어머니 말씀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요즈음 젊은 것들 편한 세상 만나 호강들 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많은 여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어렵게 살았단다. 옛날엔 여자 값어치를 누가 알아주기나 했는 줄 아니?  일일이 그 고생스러웠던 얘기를 늘어놓자면 한이 없겠지만, 아무튼 너희들은 좋은 세상을 만나 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야.  요즘 들어 입 바른 여펜네들이 신문방송 따위에 나와 부쩍 말들이 많아졌는데, 듣기엔 모두 좋은 얘기들이지.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는 가볍게 취급되어선 안되는 거란다.  일단 시집을 가게 되면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남편 어려운 줄도 알아야 하고.....]

   머리를 쓸어주는 어머니 손길이 나른하게 느껴졌다.  수희는 어머니께 더 걱정을 끼쳐드리기 전에 어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뉘엿뉘엿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어머니,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습니다.  그녀는 젊고 예뻤으며, 같은 여자가 보드래도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는 귀여운 여자였습니다.
   처음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배신당했다는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너무나도 놀랍고,  한편으로는 두려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행복한 여자였어요.  적어도 남편에게 새로운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어머니, 이 행복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중한 행복을 침해한다면 그 상대가 누구일지라도 맞서서 싸우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남편의 정부와 맞닥뜨려졌을 때 저는 이미 패배자였습니다.  그 눈부신 젊음 앞에서 저는 더 이상 적개심이나 분노 따위를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저는 그녀에게 대적할 상대가 못되었습니다.

   남편은 지금 그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한때 저를 사랑하였듯이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제 저에게 사랑한다 수없이 되뇌었던 그 입술 그 혀로  오늘은 낯 모르는 젊은 여인의 귓가에 달착지근한 밀어를 속삭이고 있습니다. 
   허무해요.  그리고 너무나도 비참한 느낌이 들어요.
   대체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할 만한 약속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어제 사랑을 맹세했던 연인들이 오늘은 만나기 이전의 남남으로 깨끗이 갈라서고,  수십 년 한 이불 속에서 뒹굴며 자식까지 낳고 해로한 부부들도 어느날 갑자기 흥정하듯 이혼합의서에 도장을 찍고 냉정히들 돌아서고 맙니다.  이제는 제 차례입니다.

   아아,  이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란 말입니까.  왜 제게 이런 일이 생겨야 하나요. 부당해요.  용납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어머니.  만일 남편이 끝내 저를 저버린다면,  그런 일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그때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어머니,  두려워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일이 무섭고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무엇이 최선이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 언뜻 분간조차 되지 않습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요.

   이제 남편은 타인의 품으로 떠나려 합니다. 옷소매를 부여잡고 하소연하고,  갈 길을 막아 마음을 돌리려 해도 그는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려 할 것입니다.
   비참한 느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버림을 받았어요.  이제 얼마 뒤에는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잊혀져버리겠죠.  죽고 싶습니다.

   어머니,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지금까지 믿고 의지해온 지반이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져 저 나락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듭니다.
   슬퍼요.  너무도 기가 막혀 죽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마음의 지주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이제 당신의 딸은 어떻게 살아야만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