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놓아버리다 (3)
아직 해가 떨어지려면 한참 이른 시각이었으나 나는 그 남자와 밝은 조명 아래 맨숭맨숭한 정신으로는 민주의 이야기를 도저히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가까운 술집 같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으면 싶었다.
나는 사무실로 전화를 해 영미에게 근처에서 볼 일 좀 보고 있으니 아주 급한 전화나 일이 있으면 핸드폰으로 바로 연락을 달라고 해 놓고 그를 데리고 그 커피숍이 있는 상가 건물 안에 들어 있는 조그만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호프집은 이제 막 문을 여는 중인지 아직 한쪽에선 청소를 하고 있었다. 물론 손님은 우리 뿐이었고 아마 첫손님이지 싶었다.
우리는 그중 이미 청소를 끝낸 듯싶은 자리를 찾아 좀 구석진 곳의 테이블 쪽으로 갔다.
그가 테이블에 앉자마자 바로 내게 정식으로 인사를 해왔다.
‘문사장님께 대해선 이미 제가 아는 처지이니 정식으로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박동석이라고 합니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두툼한 명함수첩을 꺼내 거기 한 뭉치 가득 끼워 둔 명함 중에서 한 장을 뽑아내 내게 공손히 내밀었다.
명함은 받아 보는 순간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 명함은 솔직히 명함이라고 하기보다는 어떤 광고를 하기 위해 만든 전단지나 다름없는 것으로 ‘업소, 행사, 회갑, 파티 출장 밴드... 1인 올갠 연주에서부터 3인조, 5인조, 풀밴드 출장 가능...’ 등의 문구들이 몇 가지 악기들의 촌스러운 그림 위에 찍혀져 있었고 연락 전화번호 등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맨 아래 부분에 ‘밴드마스터 박 동 석’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내가 어이없어 한 것은 내 예상을 전혀 빗나간 그 남자, 박동석이라는 사람의 직업에 대해서였던 것이다. 밴드마스터라는 직책을 달았으니 그도 결국 어떤 악기를 다루는 음악가라는 말 아닌가?
그가 악기를 다루는 음악가라니?! 나로서는 정말 전혀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솔직히 그가 유흥가 주변을 떠돌면서 술집 아가씨들 등이나 처먹는 기둥서방 비슷한 주먹, 그것도 무슨 견고한 조직에라도 속해 있는 폭력배도 아닌 별 볼일 없는 뜨내기 건달쯤으로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잠깐, 빗나간 내 예측에 어이없어 하고 있는데
‘기타를 칩니다. 20대 때까지는 그룹사운드 활동도 하고 제법 잘나갔었지요. 그땐 티브이에 출연도 꽤 했었는데...’
하고 그가 좀 멋쩍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덧붙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다시 보며 그의 단정치 못해 보였던, 그래서 내게 불량스럽다는 인상을 줬을 지도 모르는 그의 나이에 안 어울리게 상당히 긴 머리칼이 새삼 다시 보였다. 그리고 컬러가 보통 요즘 사람들의 것보다는 약간 길게 만들어져 나로선 시절 지난 구닥다리 옷쯤으로 보아 넘겼던 그의 양복 상의도 그가 악사라는 직업과 연결지어 생각하니 역시 그다운 옷차림으로 보였다.
그 남자, 박동석은 민주가 서울을 떠난 시점에서 불과 며칠 안 될 무렵 그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동안 민주의 행방을 찾아봤지만 도저히 가늠이 안 되자 몇 번이고 망설이다 나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
민주의 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그는 아직 민주에게서 마음을 다 털어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박동석에게 내가 알고 싶은, 민주에 관한 것들을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게 유념하면서 술잔을 나누는 사이사이에 자연스럽게 한 가지 한 가지 물어 갔다.
그는 보기보다 알콜에 약한 사람 같았다. 5백 씨씨 두 잔이 넘어가자 그는 낯빛이 불거지며 내가 묻지 않는 말까지 주섬주섬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그가 민주를 처음 안 것은 그녀가 유흥가로 빠져든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데 그로서도 인기도 별로 없었던, 그래서 밥벌이도 안 돼 고생만 직사하게 하던 그룹사운드를 때려치우고 룸싸롱 등을 찾아 돌아다니며 술자리에 나가 손님들 노래반주를 해주는 신세로 전락한 직후였다고 했다.
당시 민주는 강남의 한다하는 최고급 룸싸롱에 있었는데 그곳에 있던 수십여 명의 호스티스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정말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로 그의 눈에도 비쳤었다고 한다. 웨이터들에게 주워들은 말로도 민주는 그 업소에서 최고의 손님들 자리에만 나가는 여자라고 듣기도 했었고...
그렇게 여기 저기 룸싸롱들을 뜨내기 악사로 떠돌면서 민주가 끼어있는 술자리에도 꽤 여러 번 들어가 노래반주를 하기도 했었고 또 그때마다 그녀가 손님들에게 부탁하여 자신이나 동료들에게 상당히 후한 팁을 받아 내주기도 했었단다.
박동석은 그런 일 관계를 떠나서 보통의 한 사람으로 또 한 젊은 남자의 입장으로도 그녀를 볼 적마다 그는 ‘저렇게 아름답고 착하게 생긴 여자가 어쩌다 이런 데서 뭇 사내들에게 희롱당하며 술을 따르고 웃음을 팔아야 하는 지 참 안됐다.’는 생각을 번번이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민주를 자기로선 쳐다 볼 수도 없이 높은 데 있는 여자라고만 생각했고 또 감히 그 이상의 감정을 품어 볼 수도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 아니 운명적으로(박동석의 표현대로) 민주와 조우하는 역사적인 사건(역시 박동석의 표현대로)이 생기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 사건은 박동석이 술집을 떠도는 악사로 나선 지 3년째 되는 해였고 민주로서도 유흥가로 흘러든 지 그 비슷한 정도의 기간이 된...그리고 내가 나중에 햇수와 기간을 따져보니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바로 얼마 전 쯤이 되는 한 겨울이었다.
박동석은 그날 밤, 벌써 새벽 2시가 다 되는 시각에서야 겨우 마지막 업소에서 노래반주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고 했다.
털털거리는 자신의 폐차 직전의 고물차를 몰고 그때 쯤 흩뿌리기 시작하는 눈 때문에 운전을 조심하며 천천히 강남의 어느 길을 가고 있던 중이라고 했었다.
그때 그 어둡고 춥고 횡 하니 빈, 눈이 흩뿌려지는 길을 어떤 여자가 파자마 차림으로 걸어가고 있는 뒷모습이 문득 눈에 들어 왔단다.
‘별 미친년이 다 있군!’
하도 어이없는 광경이라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여자를 지나치다가 그 여자가 신발마저도 실내에서 신는 슬리퍼에 맨발이라는 것을 발견하곤 뭔가 사연이 있겠다싶어 차를 그 여자 가까이로 몰아 그 여자의 바로 앞에 세웠단다.
그리고 백미러로 자세히 살펴보니 그 여자가 바로 민주였다는 것이었다!
민주는 파자마, 그것도 어느 숙박업소의 상호가 들어가 있는 파자마로 몸을 감싸고 오들오들 떨면서 잰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박동석은 자신도 모르게 차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단다.
그녀는 누가 자신의 앞에 서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듯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면서 그의 곁을 그냥 지나쳐갔단다.
박동석으로서는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일인가 싶은 순간이었단다.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시각에 눈 오는 그 추운 밤길을 맨발에 슬리퍼 그리고 숙박업소의 상호가 찍힌 파자마 바람에, 펑펑 울면서 하염없이 걸어가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는 게 누군들 상상이나 해본 일이었을까...그런데다가 그 여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민주라니?!
박동석은 이런 저런 생각할 틈이 없이 벌써 열 걸음쯤이나 멀리 가고 있는 그녀를 쫒아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단다.
‘아니. 무슨 일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하고 그가 그녀를 돌려 세우려 했었단다.
그녀는 처음엔 그를 뿌리치려 하다가 얼핏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고는 금세 그를 알아봤는지 다짜고짜 그의 품에 안겨들며 통곡을 해대더라는 것이었다.
박동석이 자신의 품에 안겨 통곡을 하는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니 파자마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알몸인 것 같았단다. 민주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고 흐느끼느라 어깨가 거세게 흔들렸단다.
박동석은 길에 서서 그러고 있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아 그녀를 자신의 차가 있는 곳까지 거의 안 듯이 부축해 데려갔고 차의 뒷좌석에 일단 그녀를 태웠단다.
차 안은 히터가 계속 돌고 있었어서 충분히 따뜻했지만 박동석은 히터의 세기를 더 강하게 조절해 놓고 민주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잠시 그렇게 차를 세운 채 있기로 했었단다.
차 안에 들어 와서도 한참을 흑흑거리며 서럽게 울던 민주가 겨우 울음을 그치고 조금 안정을 찾았다 싶은 건 그로부터 거의 삼십여 분이나 지난 후였단다.
그녀는 박동석에게 우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곤, 미안하지만 자기 집까지 좀 태워다 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그래서 박동석은 그녀가 가자는 방향으로 코스를 바꿔 차를 몰았는데 당시 그녀의 집은 서초동의 연립주택가로 강남 쪽의 유흥가에서 일하는 호스티스들 사이에 소위 ‘선수촌’이라고 불려지던 호스티스들이 밀집해 사는 곳으로 유명했던 동네였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몇 번이나 도대체 무슨 일이었냐고 민주에게 묻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슬프디 슬픈 표정을 백미러로 살펴보고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날은 결국 그 황당한 사건의 연유를 알아내지는 못했단다.
박동석이 집 앞에 차를 세우자 민주는 너무 고맙다고, 나중에 사례를 꼭 하겠다고 인사를 여러 번이나 하고 안으로 들어갔단다.
그날 밤 박동석은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일, 보통 사람들이 흔히 겪어 보기는커녕 상상도 못해 볼 그런 이상한 일이 바로 민주와 자신의 운명적 만남이고 또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정말 별 해괴한 일이라 싶었다. 민주가 그 눈 오는 겨울밤에 파자마 차림에 울면서 거리를 헤맸다는 건 내 상식으로 도저히 상상도 가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그 뒷이야기를 박동석을 재촉해 들으면서 나는 다시 민주에 대한, 그녀의 그 길지 않은 인생에 시종일관했던 모든 불행했던 일들에 대해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하는 박동석의 눈에도, 그 이야기를 듣는 내 눈에도 어느새 물기가 젖어들고 있었다.
물론 박동석은 이미 취한 상태라 감정 조절이 쉽지 않아 그랬었겠지만 아직 취기가 오르지 않고 있었던 나 역시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그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미어져 나오는 걸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