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사라지다 (3)
민주에게서 전혀 소식이 없는 채 3일이 흘렀다.
나는 별일 아니겠지, 별일 아닐 거야... 어머니가 돌아가셨던지 해서 강릉의 동생네 집에 가 있을 거야... 민주의 결벽한 성격 때문에 그 상황에서 내가 한 전화를 받는다거나 자기가 직접 하는 게 거북해서 그런 걸 거야...곧 무슨 연락이 오겠지, 하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 슬슬 피어오르는 뭔지 모를 불안감을 떨쳐 내지는 못했다.
그동안 나는 사실, 민주의 핸드폰으로 수도 없이 통화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언제나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 소리만 되돌아 올 뿐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민주가 속달로 보낸 등기편지를 한통 받았다.
영미가 우편 배달원에게 도장을 찍어 주고 발신자 주소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 등기편지를 내게 줄 때까지도 나는 설마 그것이 민주가 내게 보낸 편지일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었다.
‘부산에서 온 건데요...’
하며 영미가 편지를 내 손에 쥐어주는 순간 나는 편지겉봉에 쓰인 낯익은 글씨를 보고 바로 민주가 보낸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나는 숨이 멎는 듯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 겉봉엔 분명 내 사무실 주소와 내 이름, 그리고 부산시 영도구 무슨 동 몇 번지라고 쓴 아래 김민주라는 이름이 또렷이 쓰여 있었고 겉봉 한구석에 붙은 등기표시 딱지에도 분명 부산 영도우체국이란 스탬프 글씨가 찍혀 있었다.
부산이라니? ... 민주가 지금 왜 부산에?!... 나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그래서 잔뜩 긴장한 채 편지봉투를 뜯어 그 속에 반듯이 접혀있는 한 장으로 된 편지지를 꺼냈다.
문방구에서 흔히 파는 줄이 인쇄된 그 편지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촘촘하게 써내려간 내용이 꽉 차 있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로 시작된 민주의 편지 글은 순식간에 내 눈에 읽혀져 내려갔다.
아마 나는 불과 1, 20초 정도의 시간 만에 그 내용을 다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듯한 충격에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미가 나를 곁눈으로 보며 아주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게 얼핏 느껴졌다.
그만큼 내가 충격을 받은 모습이 확연해 보였던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편지를 바지주머니에 쑤셔 넣고 정신없이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건물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거기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다시 민주의 편지를 꺼내 아까보다는 좀 더 느린 속도로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편지 내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여전히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진 채였고 그때부터는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으며 심장의 박동이 온몸을 때리듯 쿵쾅거렸다.
하늘이 노래 보인다는 말도 실감나듯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 제 색깔이 아닌 채 흐릿한 모습으로 초점이 잡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까지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민주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내게 받은 그동안의 사랑에 수없이 감사하고 또 자기로서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란 뜻과 함께, 지금으로서는 밝히기 곤란한 어떤 돌발적인 일로 인해 나와는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곧 잔금을 치루고 인수해야 될 양품점 문제는 없던 일로 해주고 그로인해 내가 계약금으로 걸었다가 계약 불이행으로 결국 떼이게 될 5백만 원의 손해에 대해 극구 죄송스럽다는 표현을 여러 번씩이나 써 미안함을 표시했다.
민주는 편지의 말미에 내가 자신을 찾는 일로 시간이나 마음을 쓰는 일이 제발 없기를 바란다고 했고 또 소용도 없는 일이라고 못을 박았고 마지막으로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동안 너무 미안했었다는 말과 나와 내 가정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편지를 끝맺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우선 민주에게 생겼다는, 갑자기 나를 떠나야 할 그 돌발적인 일이 무엇이었을까 하고 이리저리 추리를 해보았으나 나로선 도무지 집히는 데가 없었다.
이제 곧 양품점의 주인이 되어 그동안의 음습했던 생활을 접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그런 기회를 포기할 만큼 절박했을 그 이유를 나는 도저히 찾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불현듯 민주의 집을 직접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세를 들어 사는 집이라지만 그래도 그렇게 단 며칠 사이에 감쪽같이 집을 비우고 이사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나름의 짐작에서였다.
나는 옥상에서 한달음에 건물 밖으로 뛰어 내려와 택시를 잡아타고 민주네 집이 있는 골목 밖까지 내달렸다.
민주가 살았던 반지하방의 출입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몇 번 문손잡이를 잡고 흔들어 보다 밖으로 나와 집 뒤켠으로 나있는 창문을 낸 벽 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반 지하라 창문은 지면에서 겨우 2, 30센티 떨어진 위에 내 선채로 방문 안을 다 들여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커튼이 처져있어야 할 그 창문엔 지금 아무런 가린 것이 없이 맨 유리창뿐이었다.
그 유리창을 통해 좀 어둑하기는 했지만 방안이 들여다보였다.
아, 그러나 그 안은 역시 썰렁하니 비워져 있었다. 나와 민주가 매일 점심을 같이 먹고 알몸으로 뒹굴며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그 방안이 지금 휑하니, 이삿짐을 급히 싼 흔적만을 남긴 채 비어있었다.
다시 그 연립주택의 현관 출입문 앞 쪽으로 돌아 나오는데 그 현관으로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한 아주머니가 마침 나오다 마주쳤다. 민주와 그 집을 드나들 때 두어 번 현관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아주머니였다. 나와 민주 사이가 불륜이라는 것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던...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눈인사를 하고 급히 골목 밖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등 뒤로 그녀가 툭 뱉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 여자 그저께 아침에 부랴부랴 이사 나갔어요. 모르고 계셨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분명 비웃고 있었을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해 골목을 빨리 벗어났다.
그 아주머니의 말대로 민주가 그저께 아침에 이사를 했다면 그 전날인, 그러니까 내가 왔다가 민주가 없어 헛걸음 친 그날 저녁에서 밤사이에 급히 이삿짐을 쌌을 것이고 그 다음 날인 그저께 아침에 부랴부랴 이사를 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로 부산으로 내려간 민주가 다음 날인 어제 아침 일찍 내게 속달로 편지를 띄운 게 오늘 오후에 내게 배달되었다는 시간상의 아귀를 맞출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민주에게 생긴 뭔지 모를 그 돌발적인 일은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날 저녁에서 내가 찾아갔다가 민주가 문틈에 끼어 둔 메모지를 읽게 된 날 아침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민주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뜨겁고 격렬한 섹스를 치루면서 그녀와 시간을 보낼 때에도 민주는 내게 전혀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았었고 오히려 이제 양품점을 인수할 날이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고 기대감에 찬 흥분까지를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역시 그 남자 때문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점점 현실적이고, 그래도 가장 합당한 이유로 내 머릿속에 굳혀져 갔다.
민주에게 그 남자에 대해 좀 더 확실히 물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남자관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게 어쩐지 그녀를 의심하는 것 같고 또 나 스스로 좀스러운 행동 같기도 해 언젠가 자연스러운 기회가 주어질 때 민주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며 물어야겠다고 미뤄두고 있었는데 결국 그게 화근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사무실로 다시 돌아 와서도 내내 내 정신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다 퇴근하고 돌아 간,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사무실에 혼자 남아 별의별 가능성을 다 떠올리며 민주가 갑자기 행방을 감춘 이유에 대해 아무리 짚어 보아도 그 남자만큼 개연성을 가진 경우는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시간에 아마 열 번도 더 넘게 민주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밤 열시가 넘도록 어두운 사무실에 남아 있다 퇴근을 한 나는 아파트 앞에까지 가서도 진정이 안돼 결국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두병도 넘게 마시고 취해서야 집에 들어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