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감추다 (3)
내가 민주와 잔 모텔은 어제 밤 내가 만취했던 호프집 근처였다.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게 취한 나를 그 호프집 주인의 도움까지 청해 간신히 이 모텔에 부축해 왔었다고 그녀가 말해줬다.
어제 밤 그렇게 만취한 상태에서 아내의 전화를 받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어떤 말을 했는지 까지는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나는 민주를 재촉해 빨리 모텔에서 나가지고 했다. 오늘 아침 일찍 사무실에 중요한 일이 있어 빨리 나가봐야 한다고 둘러대고...
그때 시간은 7시 정도였었다.
나는 솔직히 민주가 있는 옆에서 아내의 전화를 받는 게 껄끄러웠다. 그리고 어제 밤 내가 인성불성인 채 아내와 통화를 했기에 혹시나 말실수를 한 것이 없나 걱정되기도 했었고.
그래서 일단 민주와 헤어져 사무실로 먼저 들어가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술에 만취한 채였으나 어제 밤 나는 내 뜻을 분명하게 민주에게 전한 것 같았고 그녀가 지금 기꺼이 내 제의를 받아들인다고 했으므로 일단 내 계획의 첫 단계는 성사가 됐다고 보고, 그 다음의 문제인 아내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이런 사실의 낌새를 전혀 눈치 못 채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가능하면 사무실에 가서 아내의 전화를 받고 싶었다. 그게 내 어제 밤의 행적을 감추는데 훨씬 더 용이할 것 같았기에...
나와 민주는 간단히 샤워를 하고 모텔을 나왔다.
점심 때 내가 전화를 하겠다고 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거기서 민주의 집까지나 내 사무실 까지는 서로 걸어서 십분 내외의 거리였다. 민주는 집이 가게 근처라고 했으니까...
나는 부지런히 걸어 사무실에 당도했다.
아직 8시 전이었다.
나는 아내의 전화를 기다릴까 하다가 내가 먼저 전화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내가 사무실 전화로 아내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면 자연스레 발신전화번호 표시가 되니 내가 사무실에 있다는 것이 저절로 증명되고 나아가 어제 밤 사무실 근처에서 술이 취해 그냥 사무실에서 잤다고 댈 핑계에 맞아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로 수화기를 들고 아내의 핸드폰 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서야 아내가 핸드폰을 받았다.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해주시고...’
아내가 시큰둥하니 먼저 말했다.
‘... 어제 우리 무슨 말 한 거지? 나 도통 생각이 안 나네...’
아내의 시큰둥한 말소리는 내가 술 먹고 다른 데서 잔 그 다음 날 걸어 온 전화마다에서 처음엔 으레 그런 식으로 말을 시작했던 스타일이라 나는 좀 안심하면서 어제 밤의 통화 내용을 슬쩍 떠봤다.
‘뭔 얘기는 뭔 얘기...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거야?...생전 안하던 소리까지 다하고...’
나는 좀 뜨끔해 다시 물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나 하나도 생각 안 나거든...’
‘그렇겠지. 완전히 혀가 꼬부라져 있던데... 당신 바람피울 거라며? 좋은 여자가 생겨서 바람피울 거라며?’
‘뭐라고?!’
나는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도대체 얼마나 술이 취했던 것이 길래 그런 말까지 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내는 내가 술 취해 횡설수설한 말로 치부하는 듯 했다.
‘그래, 어제 바람 좀 피웠어? 번호 찍힌 거 보니까 사무실인데, 거기서 바람 피웠나?’
‘미안해... 내가 진짜 술이 너무 취했었나 보네... 별 헛소릴 다 지껄이고...’
나는 한편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내에게 눙쳤다.
‘속은 괜찮아?’
아내는 다시 원래 자신의 어감으로 돌아 왔다.
‘좀...’
‘쯔쯧, 괜찮을 리가 없지... 직원들 출근하기 전에 빨리 사우나 가서 샤워하고 속 풀고 들어와요. 어젯밤 나 약 오른 거 생각하면 오늘 그냥 안 넘어가려고 했는데 당신이 먼저 전화해서 그냥 봐주는 거야.’
나는 아내에게 몇 번 미안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젯밤에도 나는 술 취하면 나오는 내 버릇이 그대로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술에 만취하면 심중에 있는 말을 그대로 해버리는 아주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업상 중요한 사람들과 만나 술자리를 같이 할 때면 그것이 항상 조심스러웠다.
아직까지 사업상 가진 술자리에서 크게 실수한 적은 없었지만 주변의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선 몇 번 큰 실수가 있었다.
상대방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이를테면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언제까지 내 심중에만 담고 있어야 할 그런 말을 나도 모르게 뱉어내 인간관계에 종내 금이 가버린 경우 말이다.
나는 다시금 그런 내 술버릇을 한심해 하면서 어쨌거나 아내를 무사히 속여 넘긴 걸 다행스러워 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자책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가슴 한 쪽이 쓰려져 오는 것도 감당해야 했다.
내 주변에서 아내 모르게 여자를 감춰놓고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결국 그 사람들도 이렇게 자신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내를 감쪽같이 속이고 있는 것이겠지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나를 포함해 전부 죽일 놈들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고등학교 동기 녀석들 중에 내가 아주 싫어하는 놈이 하나 있다.
내가 다닌 지방의 고등학교에서 대학을 서울로 진학한 동기들이 겨우 열명 남짓한 때문에 학교는 다르지만 대학 시절부터 우리 동기들은 모임을 만들어 자주 만났고, 지금도 서로 연락들을 하며 친하게 지내는 편인데 그 놈 만큼은 정말 낯짝도 보기 싫은 놈이었다.
그 놈은 명문 대학 법학과를 다녔고 학부시절 동안 학생운동이며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설쳐대다가 몇 번 씩 투옥도 됐었다. 그 바람에 대학도 근 10년 가까이 다니고 졸업을 했는데, 뒤늦게 졸업하고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한 3년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더니 사법고시를 패스했고 연수원을 졸업한 다음 바로 변호사를 개업한 놈이었다.
그때가 그 놈이 35세쯤 된 나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민주화니, 인권이니 부르짖으며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 민주투사로 자처했던 놈이 변호사를 하면서 돈맛을 알았다고 할까... 사람이 아예 180도 변해 버린 것이었다.
수완이 남달랐던지 그 놈은 변호사를 개업하고 금방 재력을 쌓아갔다. 그리고 노는 품이 그때 대부분 월급쟁이들이거나 나처럼 조그만 회사 하나 차려 겨우 중산층에 턱걸이 해 사는 우리 동기들과는 사뭇 달라져 갔다.
그놈에게 세컨드가 있다는 말은 들은 건 그 놈이 변호사 개업을 한 지 3년도 안된 시점에서 다른 동기들을 통해서였다.
그때 나는 설마 하고 웃어넘겼는데 그 얼마 후 우리 동기들끼리의 모임에 그 세컨드를 달고 나온 그 놈을 보고 나는 그만 대경실색을 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처음엔 세월이, 아니 세상이 사람을 저렇게 뒤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만 신기해했을 뿐이었는데 그 뒤 그놈이 계속해 보이는 행태에 그만 정나미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 놈은 내 알기로 2, 3년 주기로 세컨드를 바꿨던 것 같다.
자기는 계속 나이를 먹으면서도 세컨드의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자들로 계속 묶어 두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놈은 그걸 자랑삼아 세컨드가 바뀌면 우리들끼리의 모임에 한두 번씩 선을 보이는 것이었다. 교활하게도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그 자리에 나타난 것처럼 꾸며서 말이다...
나는 그때마다 그 놈도 사람같이 여겨지지 않았지만 이끌려 나온 그 젊은 여자들도 절대 곱게 보아 줄 수가 없었다. 반질반질한 외모에 명품들을 휘감고 있었지만 내 눈에 그녀들은 하나같이 창녀로 보일 뿐이었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지금 그 놈을 따라하고 있었다!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는 놈을 닮아간다더니 지금 내가 딱 그 짝인 셈인가?
점심을 먹으려 나가면서 핸드폰으로 민주와 통화를 했다.
그녀는 내게 속은 괜찮으냐, 아침은 제대로 챙겨 먹었냐 하고 걱정을 해왔다.
마치 아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