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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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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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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의 그 여자


BY 가우디 2005-09-20

"나야, 진숙이! 나, 지금 공항이야...가려구...."

"그래, 진숙아! 잘 가...결혼식에도 못가구...미안해."

"후후...괜찮아. 난 처음이지만 저스틴은 내가 세번째야. 그래서 결혼식은 간단하게 할거야...암튼...결혼이 머 별거니? 나...진짜 잘 살아볼거야. 두고 봐! 하하!" 

진숙은 씩씩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가  내겐 웬지 불안하게 들렸다.

"은아야. 부탁하나 하자."

"그래, 뭐든지...."

"호호! 고맙다. 내가 묵었던 호텔 양식당에 가면, 이신희 라는 웨이츄레스가 있거든."

"웨이츄레스?"

"응, 그 아가씨한테 내가 뭐 좀 맡긴게 있는데...그걸 울엄마한테 좀 전해줄래?"

"그래 그럴게...다른 부탁은 없니?"

"...."

수화기 저쪽에서 진숙이 울고있다.

"진숙아?"

"...울엄마한테 전화라도 자주 좀 해봐줘...부탁해...흑흑..."

"그래, 그럴게...울지말고....항상 건강해라..."

"그래..."

진숙은 아쉬운 듯 전화를 끊었다.

그날 저녁, 학원에서 조금 일찍 퇴근한 나는 진숙이 묵었던 호텔에 들렀다.

양식당은 그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창가쪽으로 자리잡고 앉은 나는 웨이터를 불렀다.

"이신희씨 라고...만날 수 있을까요?"

내가 정중하게 물었다.

"아, 예. 좀전에 통화하셨죠? 불러드리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웨이터가 친절한 몸짓으로 물러가자, 한강의 야경이 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꼭 그날밤 같네...'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앉은 곳에서 몇 층 아래쯤 되는 곳에 진숙이 묵었었던 것 같다.

멍하니 창밖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나를 부르는 기분좋은 소근거림이 들렸다. 

"김은아씨죠?"

"예. 그쪽은 이신희씨?"

"예, 이거..."

웨이츄레스는 선 채로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미국서 오셨던 손님이 맡기신 겁니다. 그리고 이거는..."

그녀는 종이가방을 식탁위에 내려놓고, 들고있던 하얀봉투도 내게 내밀었다.

"돈인 것 같아서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이제 시원하네요. 호호."

"그랬겠어요. 호호."

진심어린 친절함에 기분이 좋아진 나도 그녀를 따라 기분 좋게 웃었다.

종이가방과 돈봉투를 받아든 나는 커피한잔을 시켜 마시고 스카이라운지를 내려왔다.

"띵동!"

엘리베이터의 벨소리조차 카펫속으로 잦아드는 소근거림으로 울렸다.

나는 속삭이듯 내게 말을 걸던 아까의 그 웨이츄레스가 생각나서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기분좋은 미소와 함께 무심히 호텔현관을 나서던 나는 유령이라도 본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방금 내곁을 스쳐지나간 여자와 그녀의 하얀 기타.

보헤미안의 그 여자다.

그를 내곁에 두고 사라진 그 여자, 서울 어딘가에 있다던 그 여자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

나는 방금 스쳐간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다소 말라보였지만, 그 날 보헤미안에서 보았던 그 하얀기타는 여자가 누구인지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미애....

내 시어머니의 딸.

내 남편의 이복 누이.

영원히 사라져주길 바랬던 나의 시누이.

순간, 나는 문 옆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도 뭔가 느꼈는지 뒤돌아보았다.

"여기!"

그때 한 남자가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그 남자에게 손짓을 하고는 이내 커피숖으로 사라졌다.

나는 여자가 사라지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이 호텔에 온 이유를 한참만에야 생각해 냈고, 방금 내가 호텔 현관문을 나서는 중이었다는 사실도 한참만에야 떠올렸다.